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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시간의재</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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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guage>ko</language>
    <pubDate>Wed, 15 Jul 2026 07:07:5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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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agingEditor>물고기군</managing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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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소설들(영화들) - 이혜린 &amp;ldquo;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amp;rdquo; 손아람 &amp;ldquo;소수의견&amp;rdquo;</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97</link>
      <description>&lt;p&gt;&lt;br /&gt;&lt;/p&gt;&lt;p style=&quot;clear: both; float: left;&quot;&gt;&lt;span class=&quot;imageblock&quot; style=&quot;display: inline-block; width: 320px; margin-right: 10px;; height: auto; max-width: 100%;&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417643756A5DD7D30&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417643756A5DD7D30&quot; width=&quot;320&quot; height=&quot;320&quot; filename=&quot;tumblr_nit9vaqgMF1tdnf7qo1_500.jpg&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style=&quot;margin-right: 10px;&quot;/&gt;&lt;/span&gt;&lt;/p&gt;&lt;p&gt;나는 한국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는다. 여기에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에서다. 한 개 시장, 즉 우리나라에서 검증받은 소설과, 세계적으로 - 적어도 두 개 이상 나라에서 검증받은 소설 중에, 어느 게 더 좋은 소설일 확률이 높느냐 하면, 아무래도 후자일 수밖에 없다. 물론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시장이 항상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건 아니다. 어떤 세계적인 작가의 소설보다 더 훌륭한 한국소설이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또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찾기 위해, 과연 내가 얼만큼이나 시간을 쓸 수 있느냐 하면, ‘글쎄올시다’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정말 좋은 소설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것들 전부를 내가 읽을 수도 없는데, 이를테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도 다 찾아서 읽기에 시간이 부족한데, 굳이 모험을 찾아 떠날 이유가 없는 것 같디.&amp;nbsp;&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이것을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라고만 볼 수 없는 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소설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는 잣대 자체가 사실 분명하지도 않고, 내가 한국인이므로, 한국소설에는 분명히 한국인으로서의 나에게, 특별히 소구하는 면이 존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동일한 장소와 동일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어떤 공감대 같은 것 말이다. 그러니까 막말로 작품의 수준이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좀 떨어진다해도 한국소설에 특별히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존재하고, 그런 사람의 태도에 대해서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거의 읽지 못했지만, 예전에 읽었던 경험으로 비추어 보면, 나는 한국소설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왜? 그것을 여기에 설명하기는 좀 곤란하다. 또 그럴 자격도 나한테는 없는 것 같다. 한국소설에는 뭉뚱그려서 분명히 ‘한국소설적’인 면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지극히 한정된 소설만을, 또 그것도 아주 예전에, 읽은 나로서는 설혹 나의 생각 속에 그런 게 있다 해도, 입 밖에 내 말하기는 어렵다. 당연히 그런 나의 생각은 거의 맞을 리가 없다. 한국소설도 정말로 많은 것이다. 단지 문학상을 받은 소설이나, 이름있는 작가의 소설 몇 권 읽고 한국소설이 이러니 저러니 말하는 것은 결코 바람작하지 못하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내가 바로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해도, 다시 얘기가 처음으로 돌아가는데, 단지 경제적인 이유만으로도 나는 한국소설에 별로 손이 가지 않는다.&amp;nbsp;&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최근 우연히 두 편의 한국소설을 읽게 되었고, 비록 그것이 나의 생각 전부를 바꿔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어떤 종류의 편견은 확실히 깨트려줬다. 그것은 각각 이혜린의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와 손아람의 “소수의견”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두 작품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가장 두드러진 점이자, 내가 이 두 작품을 읽게 된 계기이기도 한 첫 번째 공통점은, 둘 다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첫 번째 공통점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둘 다 주인공이 ‘전문직’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는, 그 이전에 소설은 그 직업의 세계를 꽤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이 작품들을 읽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혜린의 “열정같은…”은 신문사 연예부 기자, 손아람의 “소수의견”은 변호사다. 나는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했다. “열정같은…”의 경우에는 작가인 이혜린이 진짜 연예부 기자 생활을 했고, “소수의견”의 작가인 손아람은 비록 변호사는 아니지만 어느 소개글에서 소설이 꽤나 리얼하게 ‘법정’씬을 다뤘다는 평을 본 적이 있다. 미리 말하자면 그런 나의 의도는 충분히 채워졌다. 분명히 외국소설에도 이런 전문직 소설들이 있고, 그중에는 이만큼, 또는 이보다 더 훌륭한 소설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외국의 이야기다. 게다가 시기적으로도, 내가 읽은 것들은 모두, 이전 시대의 것들이었다. 그에 반해 위 두 소설은 한국의 이야기다. 또 소설이 출간된 게 2010년 정도로 시기적으로도 거의 동시대라 할 만 했다. 그러니까 바로 여기, 바로 이 시대에, 신문사 연예부 기자는, 또 변호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그 직업의 특징이나 변화 등이 무엇인지, 소설을 통해 꽤 소상히 알 수 있게 된다. 그 점에 있어서 나는 아주 만족스러웠고, 분명히 ‘한국소설’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amp;nbsp;&lt;/p&gt;&lt;p&gt;&lt;br /&gt;&lt;/p&gt;&lt;p style=&quot;clear: both; float: right;&quot;&gt;&lt;span class=&quot;imageblock&quot; style=&quot;display: inline-block; width: 320px; margin-left: 10px;; height: auto; max-width: 100%;&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117C73956A5DDCB25&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117C73956A5DDCB25&quot; width=&quot;320&quot; height=&quot;477&quot; filename=&quot;original.jpg&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style=&quot;margin-left: 10px;&quot;/&gt;&lt;/span&gt;&lt;/p&gt;&lt;p&gt;세 번째 공통점은 작가에게 있는데 둘 다, 이런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정식 등단한 작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적어도 인터넷에서 찾아본 바로는 그렇다. 그런데 이게 중요할까? 그러니까 등단작가가 아니라는 점이 그들의 작품에 어떤 공통된 특징을 부여할까? 나는 그렇다고 본다. 그들의 작품이 덜 문학적이거나, 어떤 기준에 못미친다는 (이를테면 등단의 기준) 의미에서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 기준에서 자유롭다는, 즉 ‘문학적’이고자 하는, 어쩌면 ‘문학 그 자체’만으로 자족하겠다는, 그런 욕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이 말은 그 결과로 그들의 작품이 덜 문학적이다, 라는 것으로 곧바로 연결되는 게 아니다. 그것과 이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물론 문학과 ‘덜’ 문학, 또는 순문학과 대중문학을 가르는 선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거기에 꽤 뚜렷한 경계가 있다고 본다. 그것을 개별작품들로 나누는 건, 예를 들어 백 여편의 소설을 모아놓고, 순문학 작품과 대중문학 작품을 가르는 건 어렵다하더라도, 내적인 의미에서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는 이들의 작품이 ‘문학적’으로 ‘굉장히’ 훌륭하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들의 작품이 적어도 ‘대중문학’으로서는 굉장히 훌륭하다는 것이다. 굉장한 완성도를 갖췄다고 본다. 단순히 이들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것, 즉, 대중적으로 성공했다는 의미에서 그런 게 아니라, 그렇지 않았다해도, 그러니까 실패했다해도 매우 성공적인 대중소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작품은 더욱 뚜렷히 ‘순문학’과 구별된다. 다르게 말하면 실패한 ‘순문학’과 실패한 ‘대중문학’을 가르기는 오히려 더 어렵다.&amp;nbsp;&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번째 공통점 역시 작가에 관한 것인데, 이 역시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두 작가 다 소위 ‘명문대’ 인문계 출신이라는 점이다. 김혜린은 성균관대 영문학과고, 손아람은 서울대 미학과다. 이것의 의미는 뭘까? 최근의 취업난, 특히 인문계의 취업난이 이 정도 ‘명문대’를 나오고도 소설 시장에 뛰어들어야할 만큼 (거의 돈이 되지 않는) 심각하다는 걸까? 농담이다. 나는 감히 이것의 의미를 이들이 매우 순수한 마음으로 소설을 썼다는 걸 증명하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또는 매우 순진하게 말이다. 전혀 비꼬는 그런 말이 아니다. 소설에 그런 게 드러난다. 나는 이들이 매우 즐겁게 작품을 썼다고 느낀다. 다른 면에서는, 매우 성실하게 썼다고 느낀다. 명문대를 나왔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가 좋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어쨌든 학창시절을 꽤 성실하게 보냈다는 게 아닌가? 순수나 성실이나, 이런 단어의 의미를 나는 매우 개인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밝히고 싶다. 그래서 그런 품성들은 - 실제로 그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 한편으로 작품의 한계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너무 모범생스럽다고나 할까? 하지만 분명히 굉장한 강점으로 작용하는 면이 더 많다. 무엇보다 ‘소수의견’을 보면, 나는 작가가 굉장히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작품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섯 번째 공통점은, 다시 첫 번째로 돌아가는 느낌이지만, 두 작품 다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그 영화들이 모두 망했다는 것이다. 영화가 망하는데에는 수십, 수백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전문직’을 다룬 영화이자,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망한 이유는 한 번쯤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두 영화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커보인다. (사실 이 차이점은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영화에서 더 두드러진다.) ‘열정같은…’은 전형적인 ‘주인공 성장형 코메디물’이다. 대개 이런 영화에는 ‘로맨택’적인 요소도 들어가는데, 거의 비슷한 분위기가 있지만, 남녀주인공을 맡은 정재영과 박보영의 나이차가 커서인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둘의 관계는 멘토링의 관계에 가깝다. 전형적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다.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물론 여기에 ‘현실반영적’인 측면, 88만원 세대니, 청년실업이니, 비정규직이니, 또 연예부 기자로서의 고충이나, 소속사와 연예인의 갈등 구조 등등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지만 거의 양념조차도 되지 못하는 것 같다. 거의 영화의 맛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혀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건 아니다. 사실 나는 이런 ‘주인공 성장형 코메디물’을 꽤 좋아하는데, 거기에는 항상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주인공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하니까. 주인공에 감정이입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영화 자체로는 ‘매끄럽지는 않아도’ 거의 그런 목적에 부합했다고 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원작’의 정말 ‘좋은’ 부분들이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코메디적인 요소는 좋다. 원작도 결코 심각한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심각하다. 결코 가벼운 얘기가 아니고, 그렇게 끝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영화의 남자주인공인 정재영이 문제다. 원작에서 정재영은, 즉 연예부 ‘부장’은 결코 멘토가 아니다. 악역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없지만, 결코 그런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이 때문에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지는데, 영화만 보고 어느 기사에서 그 ‘정재영’이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 사람을 밝힌 것이다. 나는 그 기사를 보고, 소설을 떠올리며, 저런 ‘인간’이 여전히 잘 나가는구나 느꼈다. 물론 원작과 영화의 그 ‘부장’이 동일한 실존인물을 모델로 삼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간단히 말해서 영화와 소설은 전혀 다른 얘기다. 물론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각색은 필요하다. 어떤 부분을 잘라내고, 어떤 부분은 과장하고, 또 어떤 부분은 ‘바꿀 수’도 있다. 이를테면 새드엔딩을 헤피엔딩으로 바꿀 수 있다. 관객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소설 자체도 ‘코메디’다. 이런 류의 소설을 아마 ‘칙릿’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다른 ‘칙릿’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칙릿이라는 장르 규정만을 놓고 본다면, 소설은 거기에 매우 충실하다. 아니, 이 정도만 된다면, 결코 ‘칙릿’이라는 용어를 어떤 폄훼의 의도로 써서는 안될 것 같다.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등장인물중 누구도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공조차도 결코 ‘좋지’만은 않다.) 이 말은 똑같이 아무도 완전히 ‘나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것이 ‘코메디’라는 장르가 가지는 특성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좀 ‘웃기다.’ 좀 ‘서글프’기도 하고, 좀 ‘씁쓸하’기도 하다. 그러나 결코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 ‘코메디’적인 요소, ‘웃음’을 빼버리면, 이렇게 끔찍한 세상이 없다. 인생은 멀리서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보면 비극이다, 라는 흔한 격언을 여기서 써도 될까? 선과 악,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웃음’뿐인 것 같다. 그 짧은 순간, 금방 스러지고 마는, 단지 표피적인 것에 불과한 그런 것만이 그들을 만나게 해준다. 그 순간에, 바로 그 ‘웃음’으로 자신들이 취하고 있는 입장이나 태도가, 얼마나 부끄러운 건지,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또 얼마나 서글픈 건지 깨닫게 된다. 소설은 그런 면을 매우 탁월하게 보여준다. 영화에서 빠진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영화가 이 소설을 완전히 왜곡했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내가 원작자라해도, 아쉬워하고 씁쓸해할지언정, 결코 화가 날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웃을 것 같다. 그러니까 영화가 ‘원작’을 아주 충실하게 반영해서 만들어졌다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도 그렇게 만들어졌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랬더라면, 망해도 좀 맘이 편했을까?&amp;nbsp;&lt;/p&gt;&lt;p&gt;&lt;br /&gt;&lt;/p&gt;&lt;p style=&quot;clear: both; float: left;&quot;&gt;&lt;span class=&quot;imageblock&quot; style=&quot;display: inline-block; width: 320px; margin-right: 10px;; height: auto; max-width: 100%;&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434F23756A5DE0B1B&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434F23756A5DE0B1B&quot; width=&quot;320&quot; height=&quot;455&quot; filename=&quot;movie_image.jpg&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style=&quot;margin-right: 10px;&quot;/&gt;&lt;/span&gt;&lt;/p&gt;&lt;p&gt;반면에 ‘소수의견’은 원작에 매우 충실하다. 영화를 먼저 만들고 소설을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알고봤더니 원작자인 ‘손아람’이 직접 각본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랬다고 하니까, 이 말을 해도 될 것 같다. 솔직히 영화가 더 나은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윤계상을 도와주는 서울대 천재 법대 교수 ‘이주민’이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윤계상이 맡은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 뭔지 모르겠다. 일인칭 화자 소설이라서, 이름이 안 나왔을수도.) 영화를 보고나서 소설을 읽은 탓인지 그가 나올 때마다, 묘한 위화감이 든다. 겉돈다. 거의 아무 역할이 없다. 어떤 느낌이냐면, 나중에, 소설의 결말쯤에 이르러 어떤 반전을 일으킬 것 같은데, 예를 들어, 아무도 예상치 못한 ‘범인’이라든지 말이다, 그런 것 없이 그냥 끝이 나고 만다. 심지어 자기 본연의 역할, ‘법률적 자문’에 있어서도, 재판을 승리로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될 만한 어떤 말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를 왜 등장시켰을까? 그리고 왜 영화에서는 뺏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 ‘이주민’이라는 인물이 소설의 내적 필요성에 의해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즉, 작가 자신의 어떤 주장이나 의도를 드러내고자 필요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문제는 그 의도라는 게 너무 뻔히 보인다는 데 있다. 아니, 의도라기 보다는, 그러니까 이 소설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소설 자체, 또는 세상을 대하는 작가의 근본적인 태도에 가깝다. 가령 1인칭 화자인 주인공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아래 문장을 보자.&amp;nbsp;&lt;/p&gt;&lt;p&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lt;i&gt;&lt;br /&gt;&lt;/i&gt;&lt;/span&gt;&lt;/p&gt;&lt;p&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lt;i&gt;“이들은 단지 한 세기 전의 사고방식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자신들의 지지정당이 자신들의 이권을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판단할 능력도 안 되는 사람들. 자기 아들이, 또 자기 손자가 희생되지 않는 한 현존하는 세계의 실제 모습을 회의해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을 사람들.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그들 역시 피해자였다.”&lt;/i&gt;&lt;/span&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략히 이 장면만 설명하자면 주인공이 맡은 사건 - ‘용산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재개발을 반대하는 세입자와 철거용역 또는 경찰의 대치 과정 중에 발생한 살인 사건 - 때문에 재개발이 지연되자 원주민들이 재개발 공사 재개를 촉구하며 주인공을 고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주인공의 진술이다. 이 진술이 맞을 수도 있다. 그들, 재개발을 촉구하는 원주민들이 정말 ‘인지능력’이 부족하고, 즉, 사태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또한 피해자일 수 있다. 문제는 그렇다면 누군가는 그것, 바로 사태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얘긴데, 그건 주인공이다. 또한 작가이기도 하다. 나는 작가의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그 생각도 맞을 수 있다. 작가가 생각한 그 ‘진실’이 정말 진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소설을 잘 작동하지 않는다. 이렇게가 어떻게냐면, 여기에는 두 가지 ‘일치’가 존재하는 데 첫째는 작가의 진실과 세상의 진실의 일치, 두 번째는 작가의 진실과 주인공의 진실의 일치다. 소설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두 ‘일치’ 중 하나라도 결여되어 있어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그것이 정말 ‘일치’할까 라는 의심이 소설을 이끈다. 물론 너무 순진한 작가는 재미없다. 하지만 그만큼 재미없는 건, 영악한 작가다. 순진한 작가는 세상의 거짓에 속는다. 하지만 영악한 작가는 진실에 속는다. 만일 그가 진실을 알고 있다면, 또 그것을 진실되게 말할 수 있다면 왜 소설을 써야 하는가? 소설은 ‘진실’을 알 수 없고, 또 설령 ‘알 수’ 있다 해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쓰여진다. 이 (할 수) 없음이, 이 단단한 침묵의 이유가,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인물이 탄생하는 곳, 인물이 말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열정같은…’의 인물들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이 말의 의미는 그들이 더욱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그들은 웃기다. 이 웃김은 다분히 시트콤적인데, 그것은 또한 ’열정같은…’의 기본 구조이기도 하다. 각 장들은 마치 시트콤의 한 회분 에피소드같다. 과장되어 있고, 장면 전환은 때로 너무 빠르고, 감정들은 압축적이고 뜬금 없을 때가 더러 있다. 이에 반해 ‘소수의견’은 차분하고 꼼꼼하다.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취재가 동반되어 있는 것 같다. 정말 현실에서 일어난, 또는 일어날 수 있는 일들만, 고르고 골라서 소설에 쓰여진 것 같다. 하지만 진짜 현실적인 인물은 ‘열정같은…’쪽이다. ‘열정같은…’도 당연히 연예부 기자였던 작가의 구체적인 경험에서 소재를 빌어왔기 때문에 분명히 ‘비현실적인’ 것, 작가가 아무 것도 모르고 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소설이 ‘현실적’이고 아니고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작가가 뭘 잘 안다고 해서 그게 곧바로 현실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뭘 모른다해서, 순전히 작가의 상상력으로만 쓰여졌다해서 비현실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비현실이 되게 만드는 것, 비현실을 현실이 되게 만드는 것, 그 ‘움직임’ 속에 있다. 왜냐하면 어떤 현실적인 것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고 하면, 비현실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소수의견’에서 일어난 일, 철거민과 용역/경찰, 더 나아가서 국가와의 대립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고, 아마 앞으로도 일어날 일이다. 그곳에서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지극히 공을 들인 공판과정에서의 일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갈수록 그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것이 되고 만다. 정확하게 말하면, 작가가 발견할 거라 기대했던 진실, 작가가 이미 알고 있어서 풀어내기만 하면 드러나리라 믿었던 진실은, 마치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의미에서 비현실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많이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적어도 소설에서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다.&amp;nbsp;&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소수의견’의 결말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것이 다른 결말이 되어야 한다든지, 해피엔딩이라든지,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현실 속에, 현실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비현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현실, 다르게 말하면 그 ‘비진실’에 다가가기에는, 소설 속 인물들은 너무나 똑똑하다. 그들은 작가의 ‘진실’에 충실하지만, 그럼으로써 작가를 결과적으로 배반하고 만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도달한 진실은,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는 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를 용서하고 싶다고, 정당방위였다고 그 아버지가 주장했을 때, 검사는 그게 무슨 의미인줄 아냐고, 그것은 그렇게 죽임을 당한 아들이 또한 살인자였다는 걸 인정하는 거라고 다그친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부들부들 온 몸을 떨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문제는 작가는 그것을 알고 있다고 여긴다는 데 있다. 그래서 작가는 그 비극적인 현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이어서 ‘현실적인 비극’인 ‘그 일’이 바로 ‘아들을 잃어버린 두 아버지의 화해’라는 미담으로 결론나길 바랐던 걸까? 나는 이 결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결론,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증오하는, 다르게 말하면 진짜 ‘적’이 누구인지 모른채 가짜 ‘적’들을 향해 증오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그런 결론이 되었다고 한들, 그것 또한 틀렸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화해가 현실적이냐 아니냐도 아니고,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냐도 아니고, 그게 올바르냐 올바르지 않느냐도 아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결론에 있어 변하지 않는 것은 진짜 적이 ‘국가’라는 사실이다. 작가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생각이 틀렸느냐, 몇 번이나 반혹해서 말하지만, 이런 질문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생각에는 ‘현실적’인 어떤 것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확실히, 아까 증언대에 선 아버지의 말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게 맞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때, 전경이 아들을 죽이고, 그 아버지가 다시 그 전경을 죽인, 바로 그 순간에,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가 만들어졌고, 떨어져나왔다. 그것은 이전에 없던 것이었고, 이후에 사라질 것이었다. 그것을 말할 수 없는 것, 말이 그것을 포착하려고, 그것을 말이 되는 어떤 것으로 만들려 할 때마다,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그 말들 중에 하나가 바로 ‘국가’일 것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서, 국가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고, 또한 그것이 결과인 한에서는 ‘국가’가 아닌 것이다.&amp;nbsp;&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생각에 불과하고, 즉, ‘헛소리’에 불과할 &amp;nbsp;수 있고, 소설이 이러힌 인식에 나아갔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아니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은 결코 이 소설의 ‘궁극적인’ 문제점이 아니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진짜 문제점은 이 소설이 너무나 ‘현실적’이라는 데 있다. 그래서 진짜 ‘현실’을 놓친다. ‘열정같은…’의 인물들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이 소설 속에서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좀 ‘웃기기’ 때문이다. ‘소수의견’의 인물들은 전혀 ‘웃기지’ 않는다. 이 말은 그들이 꼭 웃겨야 된다는 게 아니라, 그 ‘웃음’에 상응하는 일종의 ‘비정상’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영화는 소설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런 인물이 있다. 바로 주인공과 직접적으로 대립했던 검사 ‘홍제덕’이다. 영화와 소설 모두를 본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만, 사실 홍제덕의 역할, 하는 일, 대사, 성격 등등은 거의 바뀐 점이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 홍제덕은 훨씬 더 빛이 난다. 어쩌면 이것은 홍제덕 역할을 맡았던 ‘김의성’이라는 배우의 힘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사실, 거의 모든 면에서 검사 홍제덕이라는 인물은 ‘권력 지향적인 나쁜 검사’라는 ‘클리셰’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또한 1인칭 화자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특성상, 소설에서, 그의 존재감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화에서 무언가, 장면이나 대사 등이 더 덧붙여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일종의 에필로그라 할 수 있는, 소설의 중심사건이 되었던 1심 공판이 끝나고 몇 년이 흐른 후 법원 앞에서 우연히 주인공과 대면하는 장면에서, 검사 홍제덕은 빛나는 대사 한마디를 던진다. &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lt;i&gt;“끝까지 들어, 임마.”&lt;/i&gt;&lt;/span&gt; 이 짧은 장면에서, 이 대사가 나오기 전까지 홍제덕은 주인공에게 존댓말을 한다. 표정은 부드럽다. 물론 좀 비아냥 거리는 느낌은 있지만. 하지만 이 대사 이후에 존댓말은 사라지고 표정은 차갑게 바뀐다. 사람이 확 달라진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가면이 벗겨진 것 같다. 이 장면 또한 소설과 거의 일치한다. 대사를 압축한 것 외에는 내용에 아무 변화가 없다. 이 내용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냐 했을 때,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또 작가 입장에서는 그랬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굉장히’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공판 과정에서 외압은 없었다는 것이다. 홍제덕의 말이다.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냥 자기가 알아서 국가를 위해 일을 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반전이라면 반전일 수 있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통치 방식이 개인에게 이미 ‘내면화’되어 있다는 일종의 통찰을 전달하려는 목적이었겠지만, 거기에 굉장한 새로움이 있느냐 했을 때 나로서는 별 감흥이 없다. (소설과 영화 전체가 그렇다. 분명히 어떤 새로운 사실들, 어떤 통찰을 전달하려 애쓰지만, 결국에는 위에서 인용한 ‘원주민’들에 대한 주인공의 묘사, 즉, 같은 서울대 미학과 출신의 ‘진중권’의 트위터에 나올 법한 내용들에 불과하다. 물론 그러한 내용도 분명히 날카로운 면이 있겠으나, 그것은 이미 다 ‘고려’되어 있는 내용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끝까지 들어, 임마’ 이 대사는 소설에 나오지 않는다. 윤계상이 대충 인사치례 말들을 나누고, 검사에서 물러나도 여전히 ‘전관예우’ 대접을 받으며 잘 나가는 변호사가 된 홍제덕에게, 그리고 그러한 현실 자체에 대해, 경멸과 씁쓸함을 담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뜨려 할 때, 영화적 구성에 있어 너무나 자주 등장하는 그 뻔한 만남 장면에서, 갑자기 홍제덕은 안면을 싹 바꾸며 윤계상에게 명령한다. ‘끝까지 들어, 임마.’ 뭘 들으란 걸까? 물론 이후에 나오는 대사를 들으란 얘기다. 외압은 없었다 등등. 하지만 그것 또한 이미 말했듯이 별 내용이 없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는 ‘끝까지 들어, 임마’를 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니까 뭐든 끝까지 들어라, 내가 말한 것은 언제나 최종적인 내용이 아니다. 당신이 내 말을 듣고 뭔가 반박하고 싶다거나 그것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싶을 때, 비웃거나 무시하고 싶을 때, 나는 항상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끝까지 들어. 임마’ 내 얘기 아직 안 끝났다. 결코 얘기는 끝나지 않는다. 이게 정말 중요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소수의견’이라는 소설과 동명의 영화 전체에서 가장 빛나는 ’대사’인 이유다.&lt;/p&gt;&lt;p&gt;&lt;br /&gt;&lt;/p&gt;&lt;p style=&quot;clear: both; float: right;&quot;&gt;&lt;span class=&quot;imageblock&quot; style=&quot;display: inline-block; width: 320px; margin-left: 10px;; height: auto; max-width: 100%;&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52FA13B56A5DE381B&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52FA13B56A5DE381B&quot; width=&quot;320&quot; height=&quot;457&quot; filename=&quot;movie_image (1).jpg&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style=&quot;margin-left: 10px;&quot;/&gt;&lt;/span&gt;&lt;/p&gt;&lt;p&gt;‘열정같은…’이 원작에 충실하지 못해서 망하고, ‘소수의견’은 원작에 충실하고 어떤 면에서 그보다 더 뛰어난 면이 있었지만 망했다. 이 사실은 뭘 증명하는 걸까? ‘소수의견’이 ‘열정같은…’보다 더 후진 ‘소설’이라는 걸까? 하지만 나는 ‘열정같은…’이 원작에 충실했다 해도 반드시 성공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것이 증명하는 사실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뭔짓을 해도 망한다는 게 아닐까? 농담이다. 이것이 증명하는 사실은 칙릿이라는 소재와 형태, 시트콤적인 구성까지 갖춘 ‘열정같은…’이 그 겉보기와 달리 ‘소수의견’보다 더 영화화하기 어려웠다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원작의 느낌 그대로 말이다. 반대로 말하면 비록 개봉하기는 어려웠지만 ‘소수의견’쪽이 훨씬 더 영화적 언어로 옮기기 쉬웠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래서 또한 이것의 의미는 ‘열정같은…’이 소설이라는 형태에서만 담을 수 있는 무언가를 더 많이 가졌다는 뜻도 될 것이다. 물론 그게 소설의 ‘수준’을 담보해주지는 못한다. 나는 다만 ‘열정같은…’이 겉보기와 달리 장점이 많은 소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주제는 비록 ‘칙릿’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형식 또한 가벼운 ‘코믹’이지만 (게다가 제목도 무슨 ‘유행어’에서 따온 것 같지만), 결코 만만한 소설은 아니다. (카프카의 ‘변신’이 원래 코믹 소설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치면 ‘성’이나 ‘심판’도 정말 ‘웃긴’ 소설이다.) 그렇다고 ‘소수의견’이 후진 소설이냐면, 절대 그렇지 않다. 읽으면서 나는 몇 번이고 감탄했다. 작가의 얘기를 들어볼 수 있다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나는 이 소설이 ‘레이몬드 챈들러’의 문장에 굉장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그런가 라는 점이다. 문장만 놓고 본다면, 챈들러가 현대 한국에서 소설을 썼다면 이렇게 썼을 것 같다. 매우 단단하고 균형잡힌 문장이다. ‘열정같은…’도 마찬가지다. 제일 먼저 말해야 했을 것 같은데, 이 두 소설을 읽고 무엇보다 내가 놀란 것은, 바로 그 ‘문장’의 훌륭함이다. 묘사가 뛰어나거나 시적이거나, 문학적이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적어도 이 두 작가는 ‘문장’이 뭔지 아는 것 같다. 한국소설을 잘 읽지 않는, 번역된 문장만 주로 읽는 나에게 한국 작가의 한국 문장이란 게 이렇게 단단하고 좋을 수 있다는 걸 알려준 것 같다.&amp;nbsp;&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말했듯이 나는 이 두 소설이 매우 훌륭한 ‘대중소설’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이 정도만 되면 시간이 별로 아깝지 않다. 그러나 매우 훌륭한 ‘소설’이냐, 그러니까 이 작가들의 작품을 내가 더 읽고 싶느냐 라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물론 그 차이가 뭔지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단지 ‘대중소설’이라서 그런 건지, 그렇다면 대중소설과 그냥 소설 또는 대중소설과 순수소설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내 스스로 대답해야 할 것 같은데, 아니면 대중소설이라도 내 취향이 아니라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 분명히 매우 훌륭한 ‘대중소설’은 그냥 소설로서도 매우 훌륭하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니까 마크 트웨인의 소설들이나, 찰스디킨스, 심지어 도스도옙스키의 소설도 당대에는 분명히 ‘대중소설’이었던 것이다. 대중소설과 순수소설을 가르는 기준에 대해서, 나는 어느 정도 위에서 설명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특히 ‘소수의견’의 어떤 아쉬운 면에 대한 얘기에서 말이다. 어떤 면에서 나는 더 이상 매우 훌륭한 ‘대중문학’이 곧바로 매우 훌륭한 ‘순수문학’이 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 얘기는 너무 어렵고, 또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이 글도 이미 너무 길다. 그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진짜, 너무 길게 썼다.&amp;nbsp;&lt;/p&gt;</description>
      <category>독후감</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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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5 Jan 2016 17:36:0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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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6.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96</link>
      <description>&lt;p&gt;어젯밤 문득 생각난 건데, 어렸을 적 나는 꽤 눈치를 보는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남들에 비해 더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죠.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에는 그런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남들에 ‘비해’ 어쩐다 저쩐다 이런 생각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절에는 온통 나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차 있으니까요. 이 말은 거꾸로 세상 모든 사람이 나와 똑같으려니, 나와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려니 여긴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그중에서 기억나는 것 중의 하나는, 아버지의 혀를 차는 소립니다. 정확히 말의 표현대로 ‘혀를 차는’ 소립니다. 쯧쯧 하는 거죠. (웃기게도 이 버릇은 나한테도 있습니다. 나 자신이 그렇게 혀를 찰 때마다, 깜짝 놀라고 또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었죠. 분명히 뭔가 맘에 들지 않거나 화가 났거나 해서 그런 소리를 내신 거겠죠. 그게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을지라도, 들을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할 정도로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역시 남들도 어쩐지 저쩐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이 스트레스의 원인 중 하나는, 그렇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나 자신이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많은 일들이 이런 식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일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면, 거기에 더해서 그 정도 일로 힘들어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화가 나는 식이죠. 상처에 상처를 더한다는 표현을 여기에 써도 될까요? 아무튼 그게 너무 싫어서, 항상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일이었는데, 하나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 즉, 그만한 힘이나 권력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에 대한 철처한 무관심입니다. 이런 나의 바람이 이루어졌을까요? 따져보면 꽤 오랫동안 나는 그런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꽤 오랫동안 별 눈치 안보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젯밤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거겠죠. 앞서 말한 둘 중에 어떤 방향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주었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둘 다 일 수도 있고, 그저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어렸을 적 아버지처럼 나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칠만한 사람이 주위에 없기도 했고, 또 그런 사람이 생길만하면, 가까이 다가올 것 같으면 전속력으로 도망치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운이 좋았기 때문이겠죠. 결코 내가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뿐만은 아닙니다. 적어도 어느정도는 나 자신이 뭔가를 포기하며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써왔습니다. 그것이 비록 나에게 큰 즐거움을 주는 일이라해도, 흔히 말하는 것처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처럼, 사람에게 얻는 즐거움은 또 그만큼 그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그런 사람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써왔다는 것입니다. 개입하지 않겠다. 신경쓰지 않겠다. 이것이 나의 모토였다는 생각도 드네요. 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정말 잘못된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은 거의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내가, 전형적인 나르시스적 주체였다는 것뿐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저 내가 남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아주 이기적인 인간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것은, 아무도 그런 식으로 살 수 없다든지, 또는 그렇게 사는 것의 결과가 결국 불행이 될 거라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면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을 거라든지, 결국 고독사할 거라는데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을 뿐더러, 그렇게 살아봤자 끝은 뻔합니다. 일견 모순되게 보이는 이 두 가지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에 항상 실패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그것이 실패해도 실패고, 성공해도 실패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 아니죠.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것은, 그것이 결국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름 어떤 즐거움을 포기하면, 그만큼 불행이나 고통도 줄어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던 거죠. 그렇게 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한 적도 없고, 또 포기해봤자, 타인 또한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그렇게 살 수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면, 대체 어떡하란 말일까요? 마치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것도 사실입니다. 정말로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까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까요?)&lt;/p&gt;&lt;p&gt;하지만 정말로 어려운 것은, 바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어젯밤, 그리고 다음날인, 바로 지금 내가 내린 결론입니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또 해야만 하는 전부인 것 같습니다.&amp;nbsp;&lt;/p&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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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7 Dec 2015 17:44:0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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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80%의 사람들을 무의미하고 쓸모없게 만드는 체제</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95</link>
      <description>&lt;p&gt;지금까지 몇몇 사회분석가와 경제학자들이 주장했듯이 우리 시대에 폭발적으로 치솟은 경제 생산성으로 인해 우리는 80대 20 법칙의 극단적 실례와 마주하게 된다 - 다가오는 세계경제는 단지 20%의 노동력이, 필요로 되는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는 상태를 향해 갈 것이며 따라서 80%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그리하여 잠재적 실업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 논리가 극단에 이르면 그것을 자기부정으로 이끄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즉 80%의 사람들을 무의미하고 쓸모없게 만드는 체제는 그 자체가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것이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 슬라보예 지젝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중에서&lt;/p&gt;</description>
      <category>책갈피</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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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2 Apr 2015 10:08:37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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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센스 'sleep tight'</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93</link>
      <description>&lt;iframe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EZ0hCATlcgY&quot; width=&quot;854&quot; height=&quot;510&quot; frameborder=&quot;&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gt;&lt;/iframe&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p class=&quot;p1&quot;&gt;&lt;span class=&quot;s1&quot;&gt;깨고 나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길 바라지만 난 여깄고&lt;/span&gt;&lt;/p&gt;&lt;p&gt;








&lt;/p&gt;&lt;p class=&quot;p1&quot;&gt;&lt;span class=&quot;s1&quot;&gt;좋지도 싫지도 않아 난 여깄어 여깄어&lt;/span&gt;&lt;/p&gt;&lt;/div&gt;&lt;p&gt;&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책갈피</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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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0 Mar 2015 15:30:27 +0900</pubDate>
    </item>
    <item>
      <title>비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스칼렛 요한슨에 대해서</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92</link>
      <description>&lt;p class=&quot;p1&quot; style=&quot;clear: both; float: left;&quot;&gt;&lt;span class=&quot;imageblock&quot; style=&quot;display: inline-block; width: 300px; margin-right: 10px; width: 300px; height: 322px;; height: auto; max-width: 100%;&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747325054CD85DA2D&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747325054CD85DA2D&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322&quot; filename=&quot;comment_PkbYLuTJzOtgYvrQeXQTX3RsWNCNl3qe.jpg&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style=&quot;margin-right: 10px; width: 300px; height: 322px;&quot;/&gt;&lt;/span&gt;&lt;/p&gt;&lt;p class=&quot;p1&quot;&gt;생각해보면 나는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여배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최근에 그녀의 영화 세 편(‘언더 더 스킨’, ‘루시’, ‘her’)을 우연찮게(?) 연달아 보고 나서 뭔가 써볼까 싶어, 그녀에 대해 내가 뭘 알고 있는지 떠올려보니, 할 만한 얘기가 꽤 있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영화를 꽤 많이 봤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영화를 꽤 많이 본 사람은 꽤 많을 것이다. 유명한 여배우니까. 하지만 어떤 여배우의 영화를 꽤 많이 봤다고 해서, 그 영화에 대해 모두 꽤 많은 할 얘기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따져보니 나는 그렇다. 그런 면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적어도 나한테는 꽤 의미있는 여배우인 것 같다.&lt;/p&gt;&lt;p class=&quot;p2&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내가 제일 처음 본 그녀의 영화가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이제 얘기 할 세 편의 영화 중에 한 편이었을 것이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이든, 나는 그 영화에 나온 스칼렛 요한슨을 보면서, ‘우와, 정말 매력적인 배우네.’하고 느꼈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나머지 두 편을 본 것일 수도 있다. ‘판타스틱 소녀백서’,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이렇게 세 편이다. 이 영화의 개봉 순서는 모르지만 - 찾아보면 알 수 있겠지만 - 어느 것이나 꽤 오래 전 영화다. 게다가 세 편 다 스칼렛 요한슨은 주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랑도 통역이…”는 주연이랄 수도 있지만.&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판타스틱 소녀백서’는 일종의 소녀들(?)의 성장영화다. 어렸을 때부터 성장영화나 성장소설 같은 걸 원체 좋아했던 나인지라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지만, 꽤 재밌는 영화다. 예전에는 이런 영화가 자주 나왔다. 뭐랄까, 성장영화이면서, 또 청춘영화랄까. 왕따 얘기도 나오고, 섹스 얘기도 나오고. 학교 식당, 미녀 치어리더 등등(요즘 영화 중에는 단연 ‘스파이더맨 1편’의 분위기를 떠올리면 된다.) ‘판타스틱 소녀백서’를 비디오 테이프로 봤는지 어쨌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비디오 테이프로 봤던 이런 성장영화들이 꽤 있었다. 비디오 가게에서 이런 영화를 빌리는 게 어쩐지 쉽지 않았던 기억도 난다. 영화가 야해서 그런 게 아니라, 흔한 말로 다 큰 사내가 이런 여자들이 나오는 성장영화 같은 걸 보는 게 쪽팔리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딴 얘기지만 그 중에 기억나는 영화로 ‘연애학 개론’이란 게 있었다. 이 영화 자체도 꽤 재밌었지만 나중에 어떻게든 다시 이 영화를 기억하게 된 계기가 ‘조 뎀프시’라는 배우 때문이다. 이 배우가 누군지 아는가? 바로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뇌신경외과’ 의사로 나오는 사람이다. 유명한 아역배우 출신이었는데 성인이 되면서 침체기에 빠졌다가 다시 재기에 성공한 몇 안되는 배우 중의 한 명, 또는 그런 하나의 훌륭한 케이스인 배우다. (이런 배우로는 ‘천재소년 두기’도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나를 찾아줘’에 나왔다.)&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아무튼 ‘판타스틱 소녀백서’는 그런 영화인데, 사실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스칼렛 요한슨은 여기서 주인공의 친구로 나온다. 허스키하면서도 나른한 목소리. 정말 스칼렛 요한슨의 어린 시절 모습이라 해도 될 만한, 그러니까 실제로 저런 성장기를 거쳤을 법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런 표현은 웃긴데, 실제 ’스칼렛 요한슨’이 어떤 여자인지도 모르는데, 현재의 그녀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는데, 과거 그녀의 학창 시절 모습이었을 것 같다니, 뭔가 거짓에 거짓을 더한 것 같은 표현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지 않을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녀는 ‘나홀로 집에2’에도 나온다. 그 귀여운 캐빈의 누나로 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기억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른 아침이거나 늦은 밤이다. 주인공 소녀는 어느 버스정류장에 있는데, 그곳에서 항상 버스를 기다리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 버스정류장에는 버스가 서질 않는다. 그래서 이전에도 몇 번인가 그 사람에게 주인공 소녀는 그 사실을 알려준다. 아저씨, 버스는 여기에 서질 않아요. 그런데 그날에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번에는 그녀가 그곳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이윽고 버스가 나타난다. 그녀가 버스를 타고 떠나면서 영화는 끝난다. 이렇게 글로 풀어 썼는데도, 굉장히 인상적일 것 같지 않은가? 정말 그렇다. (그런데 아쉽게도 정확히 장면이 저렇게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내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다.)&lt;/p&gt;&lt;p class=&quot;p2&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코엔 형제의 영화다. 나는 ‘바버(이발사)’다, 라는 주인공(그 남자)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영화다. 흑백 영화이고, 코엔 영화 중에서도 특별히 더 예술 영화라서 한국에서 개봉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코엔 형제의 영화를 꽤 좋아해서 웬만하면 빼놓지 않고 다 보는데, 이 영화는 개봉 당시(미국)에 전혀 알지 못했다. 나중에 누군가 얘기해줘서, 혹은 어느 기시나 해설을 보고나서 보게 됐다. 내가 알기로는 이 영화의 시발점은, 코엔 형제가 어느 이발소 벽에 걸린 ‘단정하게 머리를 깎은 단골 손님들 사진’을 본 것이었다. 코엔 형제(둘 중의 누구였을까?)는 거기서 힌트를 얻어 어떤 ‘이발사'를 상상해냈다. 실제로 영화의 초반에 그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아이들의 머리를 여러 스타일로 이발해서, 마치 우리가 잡지 같은 데서 보는 일종의 예시처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출연진 면면은 꽤 화려한 편이다. 일단 주인공인 ‘이발사 - 그 남자’로는 ‘빌리 밥 손튼'이 나온다. 안젤리나 졸리의 전 남편으로 우리한테는 유명하지만, 그전에도 이미 연기파 배우로 명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부인으로 코엔 형제의 단골 배우이자, 형제 중 한 명의 실제 부인이기도 한 여배우가 나온다. 지금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파고'에서 임신한 경찰로 나온 여배우다. 마지막으로 유명한 배우는 역대급 미드 ‘소프라노스'의 ‘제임스 갠돌피니’다. 지지난해, 2013년에 갑작스런 사망소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던. 이 자리를 빌어 늦어지만 명복을 빈다. 아마 ‘소프라노스' 이전에 출연한 작품일 것이다. 또 ‘드라이크리닝법'을 개발한 외판원으로 나온 배우도 낯이 꽤 익다. 이런 화려한 배우진 중에 ‘스칼렛 요한슨'이 끼어 있는데, 아마 이 영화를 본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그녀가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지 모른다. 일단 이 당시에는 그녀가 별로 유명하지도 않았고, 분위기도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게다가 흑백영화이기도 하니. 또한 분량도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정말 인상적인 배역을 맡고 있다. 그녀는 시골 동네의 흔한 소녀(또는 처녀)로 나오는데, 주인공이 어디선가 들리는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에 끌려 어느 파티집 2층 다락같은 곳에 올라가서 만나게 되는 것으로 그녀는 처음 등장한다. 다소 신비롭게 말이다. 그녀는 물론 동네 이발사인 ‘그 남자'를 알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아빠나 오빠를 따라 그 이발소에 들렀다고 한다. 이발사도 얘기를 듣고 보니 누군지 알 듯 했지만, 어쨌든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된 그녀의 얼굴은 처음 본 것 같다. 그 첫 만남 이후 몇 장면이 지나고나서, 동네에서 또 무슨 음악제 비슷한 게 열려 ‘그 남자'는 다시 그녀의 연주를 듣게 되고, 처음처럼 깊은 감명을 받는다. 음악제 뒷풀이 같은 자리에서 그녀를 찾아다니다 남자친구와 함께 있는 그녀를 발견한다. 언뜻 실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녀를 위해서 뭔가 해주고 싶었던 그는, 시내에서 유명한 피아노 선생에게 그녀를 보여주기로 한다. 하지만 그녀의 연주를 들은 피아노 선생 -프랑스에서 공부한 걸로 되어 있다.-은 그녀에게 아무 재능이 없다고 단정짓는다. 여기에 꽤 인상적인 표현이 나오는데, 피아노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아마 아주 유능한 타이피스트는 될 수 있을 거요. 이발사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그에게 버럭 화를 내고 그녀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난다. 다시 그녀를 옆자리에 태우고 운전해서 마을로 돌아오면서 다른 선생에게 가보자고 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 - 스칼렛 요한슨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녀 자신도 자신에게 아무 재능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아저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여기까지 따라왔지만, 어쨌든 이걸로 끝냈으면 한다고 말한다. 이런 태도가 정말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배우에게 이상하게 딱 들어맞지 않는가? 뭔가 세상의 비밀을 모두 다 알고 있다는 태도. 어떤 땐 아주 순진무구하고, 거의 바보같이 보일 정도로 어려 보이다가도, 다른 순간에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고, 그래서 이미 체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아무 기대없이 꿋꿋하게 세상을 잘 살아갈 것 같은 여자 아이. 하지만 결정적은 장면은 그 다음에 나온다. 갑자기 그녀는 ‘그 남자’에게 뭔가 사례를 하고 싶다고 말하며 운전을 하는 그의 무릎(?) 쪽으로 얼굴을 가져간다. 남자는 당황하며 무슨 짓이냐며, 그러지 말라고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다. 그러다 당연하게도 사고가 나지만, 사고 장면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고, 마지막에 자동차 바퀴 휠이 떨어져 나와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으로 장면은 끝이 난다. 동그란 자동차 휠이 빙글빙글 도는 것으로. 그것은 곧바로 ‘UFO’의 상징으로 오버랩된다.&amp;nbsp;&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해설이나 인터뷰에 언급됐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분명히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라는 소설에 굉장한 영향을 받고 있다. 마지막 5분, ‘그 남자’가 감옥에 갇히고 나서 진행되는 독백은 거의 표절이나 오마주에 가깝다. ‘포스트맨…’은 정말 끝내주는 소설이다. 나는 그 소설의 마지막만큼 멋지게 끝나는 소설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마지막 문장을 따라 적어보자면 이렇다.&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맥코넬 신부가 생각해 낸 건 아니지만, 또 다른 생이 진짜 있을 것 같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난 그걸 믿는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전부 날아가 버린다.&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집행유예는 없다.&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여기 사람들이 온다. 맥코넬 신부는 기도가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한다. 당신이 여기까지 읽었다면 날 위해, 그리고 코라를 위해 기도해 주길. 거기가 어디이든 우리가 함께 있기를.”&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 제임스 M. 케인,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중에서 -&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원제목은 “Lost In Translation”, 번역하자면 ‘통역 속에서 길을 잃다’쯤이 될 것이다. 원제목의 뜻과 달리, 한국어 제목 번역은 길을 잘 찾은 셈이다. 앞서 말한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원제목은 “Ghost World”이다. 유령세계라… 이것도 차라리 한국어 제목이 나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요즘에는 이런 식으로 한국어 제목을 따로 붙이는 걸 보기 어렵다. ‘인터스텔라’니 ‘그래비티’니 ‘엣지 어브 투모로우’니 해서, 외래어도 되지 않는 어려운 단어들은 그대로 제목으로 쓰는 데, 이게 과연 맞나 싶긴 하다. 도대체 처음 들으면 뜻을 알 수가 없다.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다시 한국어 제목을 따로 붙이게 되면, 그게 또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최근에 개봉한 ‘박물관이 살아있다’같은 제목을 보면, 개인적으로 이렇게 잘 지은 제목이 오히려 영화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 원제목은 “Night at the Museum” - ‘박물관의 밤’이다. 얼마나 시시한가?&lt;/p&gt;&lt;p class=&quot;p1&quot;&gt;“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역시 굉장히 훌륭한 연기파 배우 ‘빌 머레이’가 나온다. 빌 머레이하면, 우리 나이 또래 사람들은 당장 ‘고스터 버스터즈’를 떠올릴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던 것 같다. 정말 재밌게 봤다. 그 사운드트랙도 잊을 수가 없다. 자꾸 예전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정말 예전에는 이런, 뭐랄까, 시즌 영화란 게 참 낭만이 있었던 것 같다. 흔히 말하는 ‘연말연시 영화’란 게 있었다. 가서 한바탕 웃고 나오면 왠지 시간을 잘 보낸 것 같은, 어떤 의례를 마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연말연시’, 즉 ‘크리스마스 시즌’ 영화의 대표격은 ‘다이하드’ 시리즈가 더 유명하지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다이하드’ 1편과 2편, 둘 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건이 벌어지고, 마지막에는 꼭 크리스마스 캐롤을 배경으로 엔딩크레딧이 올라갔다. 요즘에는 이런 류의 영화가 뭐가 있을까? 선뜻 떠오르는게 없다.&amp;nbsp;&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또 언급할 만한 것은 감독에 대한 것이다. 여자감독인데, 프란시스 코폴라의 딸이라고 한다. 이 영화로 상당한 인정을 받았던 것 같은데, 그후 소식은 잘 듣지 못했다. 지금은 뭐하고 있으려나? 헐리우드에서도 사실 ‘여성감독’을 보기 어려운 데, 최근 가장 잘 나가는 감독이 아마 ‘허트 로커’와 ‘제로다크서티’를 만난 ‘캐서린 비글로우’일 것이다. 이 여자는 ‘제임스 카메론’의 전부인으로도 유명하다. 우리 때 이 여성감독이 만든 영화 ‘블루스틸’이란 게 있었다. 제목만큼 서늘하고 감각적인 영화다. 최근에 한국 여성감독의 영화 한 편을 봤는데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지금 찾아보니 ‘환상속의 그대’를 만든 ‘강진아’ 감독이다. 이 영화 상당히 좋다. 주연배우인 ‘이희준’도 연기가 참 좋았다. 다만 이 영화 한 편은 참 좋았지만, 어쩐지 ‘개인적인 체험’에서 가져온 부분이 많지 않았을까 싶어서, 다음 영화를 봐야지만 이 감독이 과연 계속 좋은 영화를 만들지 안 만들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다음 영화 소식은 아직 없다. 옆길로 많이 샜지만 아무튼 “사랑도 통역이…”는 여성 영화 특유의 감성이 뚝뚝 묻어나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스칼렛 요한슨은 여전히 스칼렛 요한슨이었지만, 이전 영화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게 나온다. 빌 머레이와 스칼롯 요한슨이 일본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영화의 전부인데, 이게 심심하면서도 재밌다. ‘샤브샤브’ - 정확히는 아마 일본식으로 ‘스키야키’인 것 같은데, 이것을 먹으러 가서 종업원이 세팅만 해주고 떠나자,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두 사람이 당황하는 장면이 있다. 나중에 빌 머레이가 ‘어떻게 이렇게 비싼 요리인데 손님이 직접 조리까지 해야 하냐’고 하는데, 듣고 보니 과연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 역시, 마지막 장면이 유명하다. 어떤 영화나 소설은 엔딩이 너무 좋아서, 거의 그것만으로 ‘반 먹고’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도 그렇다. 빌 머레이와 스칼렛 요한슨은 그렇게 일본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지만, 처음부터 무슨 연인 관계도 아니었고(그러기에는 나이 차도 너무 많고 스칼렛 요한슨은 남편이 있다.) 그렇게 발전할 가능성이 보인 것도 아니어서,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는데, 마지막에 두 사람이 거리 한복판(물론 도쿄의 거리다.)에서 서로 포옹을 나누게 된다. 결코 뜨거운 포옹은 아니고 그저 친밀감의 표현인 포옹이다. 그때 빌 머레이가 요한슨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인다. 그런데 뭐라고 속삭이는지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저 두 사람의 표정만 번갈아 보여주고 두 사람은 포옹을 풀고 카메라는 물러난다. 이게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아마 유튜브나 그런데 가면 이 장면만 따로 편집해서 올린 게 있을 것이다. 꼭 보기 바란다. 이것만 봐도 이 영화의 반은 본 셈이라 한다면, 이 영화를 너무 폄하하는 게 될까? 어쨌든 좋은 영화다.&amp;nbsp;&lt;/p&gt;&lt;p class=&quot;p2&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이후에도 스칼렌 요한슨은 꾸준하게 영화를 찍었고, 나 역시 꾸준하게 그녀의 영화를 봤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아도 그렇게 됐다. 상업영화나 그저 그런 영화에도 나왔지만, 우디앨런 같은 명감독의 영화에도 여러 차례 불려 나왔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굳이 헐리우드 여배우로서의 그녀의 위치와 존재감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엄청난 대박영화이자 시리즈물인 ‘아이언맨'과 ‘어벤저스'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는데, 그런 블록버스터 액션물에 잘 어울릴까, 또 나이 탓인지 조금 힘에 부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스칼렛 요한슨이 아니라면, 배신한 소련 스파이인 ‘블랙위도우' 역할에 누가 어울릴까 따져보면, 나로서는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 것 보니, 역시 그녀라는 생각이다.&amp;nbsp;&lt;/p&gt;&lt;p class=&quot;p2&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아무튼 그런 그녀가 최근에 세 편의 영화를 연달아 찍었다. 순서는 알 수 없지만, ‘her’, ‘언더더스킨’, ‘루시’다. 이 세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당연히 첫 번째 공통점은 스칼렛 요한슨이 나온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녀가 ‘비인간’이라는 점이다. 정확히 하면 ‘루시’에서는 비인간이 아니라 ‘초’인간이 맞을 것이다. 원래는 인간이었다가 약물의 도움으로 뇌의 10%이상, 마지막에는 100%까지 사용하게 되면서, 인간을 완전히 넘어선 존재가 된다. ‘Her’에서는 운영체계다. 윈도우니,&amp;nbsp; OSX니, 리눅스니 하는 컴퓨터 운영체계 말이다. 흔히 인공지능 컴퓨터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인공지능컴퓨터라 하면 어떤 유일한 존재이지만, ‘Her’에 나오는 운영체계는 복수의 존재다. 내가 가진 윈도우 운영체계를 다른 사람도 똑같이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얼핏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기긴 하는데, 이를테면 여기에 등장하는 그녀 - 스칼렛 요한슨은, 그렇게 수천 수백만개의 존재인 건지, 아니면 하나의 존재인데 다만 동시에 여러 곳에서 존재하는 건지, 개념적으로 엄밀히 구분하기 어렵다. 사실 이 두 가지 차이 그 자체가 나름 철학적인 주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아이폰의 ‘시리’같은 존재를 떠올리면 된다. 마지막으로 ‘언더더스킨’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외계인’이다. 여기서도 정확히 하면 스칼렛 요한슨은 외계인에 희생된 지구인이고, 외계인이 단지 그 탈을 쓰고 있다 할 수 있지만, 어쨌든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이고 목소리다.&amp;nbsp;&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그런데 이런 스칼렛 요한슨의 행보는 순전한 우연이었을까? 그러니까 비인간적인 어떤 존재라는 역할을 특정한 시기 내에 연달아 세 편이나 맡게 된 것은, 그녀 자신에게 아무 의도 없이 일어난 일일까? 아니면 그녀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일일까? 반대 측면에서 보자면, 영화의 제작자나 감독은 이 영화를 구상하고 제작하기로 결정하면서 맨 맨저 스칼렛 요한슨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누구라도 좋았으나, 우연히 요한슨이 시기나 여러 면에서 맞아 떨어져 하게 된 것일까? 물론 우연히 이 모든 일이 일어났을 리는 없다. 세 영화 다,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는 아닐지라도, 결코 적지 않는 돈이 들어가는 영화에서 되는 대로 캐스팅이 이루어졌을 리도 없고, 요한슨 입장에서도 자신이 원하지 않았다면 굳이 출연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캐릭터란 게 그렇다. 이를테면 류승범이라는 배우가 있다. 우리는 대충 그가 어떤 캐릭터를 맡을지 짐작하게 된다. 양아치 말이다. 그래서 연기변신이란 표현도 있고, 또 연기의 폭이란 말도 있다. 류승범, 봉태규, 임창정 등등. 비슷한 느낌의 배우들이 있다.&amp;nbsp;&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그러니까 재밌는 점은, 애초 누구의 제안이었든, 그러니까 시작이 어찌되었든,&amp;nbsp; 스칼렛 요한슨에게는 어떤 ‘비인간’적인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런 분위기가 잘 맞아떨어지는 배우라고 여겨진 셈이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그런 역할에 별 거부감이 없거나, 자신이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연히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려 세 편이나, 스칼렛 요한슨은 ‘비인간적 존재’를 연기했고, 그런 역할에 맞는 배우로 캐스팅되었다. 이런 배우로 또 누가 있을까? 가령 위노나 라이더를 보자. ‘에이리언3편’에서 그녀는 매우 인상적인 사이보그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그후에 그 비슷한 어떤 영화를 찍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배우라도 한 편은 있다. 왜냐하면 그런 영화는 끊임없이 제작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연달에 세 편은, 내가 아는 바로는 없다.&amp;nbsp;&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과연 그렇다면 스칼렛 요한슨에게 있다고 여겨진 바로 그 ‘비인적인 분위기’가 뭐냐는 것이다. 류승범은 양아치 역할을 잘한다. 정말 그렇다. 하지만 이때 우리는 실제 양아치를 알고 있기 때문에, 류승범이 가진 양아치적인 분위기가 뭔지 알 수 있다. 얼마나 닮았는지, 닮게 연기했는지 비교할 수 있다. 하지만 ‘비인간적 존재’ - 외계인, 인공지능컴퓨터라는 캐릭터는 실제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앞서 말한대로 인공지능컴퓨터라면 그동안 숱한 영화에서 등장했었고, 또 아이폰의 ‘시리’같은 존재도 있고 하니 전혀 모른다고 할 수만은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Her’에 나오는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사만다 - 그녀’는 일반적인 인공지능 컴퓨터와는 정말 다르다. 여기에 이 영화가 지닌 매력이 전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분명히 사만다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인공지능컴퓨터와 거의 닮지 않았지만, 그래서 매우 인간적인 형태로 표현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바로 이것이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비인간적인 존재’가 지니는 특징이다. 그리고 곧바로 그것은 스칼렛 요한슨이란 배우 자체가 지니고 있는 아주 특별한 점인 것 같다.&amp;nbsp;&lt;/p&gt;&lt;p class=&quot;p2&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세 편의 영화 중에 가장 떨어지는, 그러니까 가장 상업적인 영화는 ‘루시’다. 사실 ’상업영화’로서도 그닥 평가가 좋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형편없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폼이 떨어졌다 해도 ‘레옹’의 ‘릭 베송’감독이 아니던가? 우리 때는 ‘레옹’ 이전에 ‘그랑 블루’라는 영화로 더 유명했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특히 어디서 영화 좀 봤다고 자랑이라도 할라치면, 반드시 빼놓지 않고 봐야 할 영화 중에 한 편이었다. ‘그랑 블루’는 아주 단순한 서사를 갖고 있다. 두 남자가 나오는데, 두 사람 다 ‘심해잠수부’다.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지만.) 그래서 아무런 보조기구 없이 얼마나 더 깊이 잠수할 수 있느냐 하는 시합을 벌인다. 그것은 공식적인 대회고, 두 사람은 라이벌이다. 이 두 사람 중 하나가 나중에 ’레옹’을 연기한 배우고, 단순히 말하면 ‘나쁜 편’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단순성이 있다. 착한 편과 나쁜 편의 대결. 물론 나쁜 편이라 해도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그런 악인은 아니고, 더 투쟁심이 강하고 이기기 위해 약간의 편법을 사용하는 정도다. 인상적인 대사가 있다. 나쁜 편, 나중에 ‘레옹’을 연기하게 되는 배우가 연기한 인물에게, ‘심해 잠수’란 싸움이다. 라이벌인 착한 편과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바다’와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착한 편’은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싸우려고 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먼저 바다를 받아들이면 결국 바다도 나를 받아들여준다. 대충 이런 대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단순하고 따져보면 별 뜻도 없는 말이지만, 내가 영화를 볼 당시에는 뭔가 있는 것 같았다. 영화와 함께, 영화 속에서 그 대사를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아직 어려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다시금 생각해보면, 여전히 거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종병기 활’이란 영화에서도 이 비슷한 대사가 있었던 것 같다. ‘바람은 계산하는 게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그 뜻이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릭 베송’의 힘은 이런 데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괜히 허세부리지 않고 아주 단순한 내용을 그대로 단순하게 밀어붙이는 것. (문득 이 대목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떠오르는데, 이 감독은 거꾸로 그게 뭐든지 간에, 좀 복잡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알고 보면 아주 단순한 데 말이다.)&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그러니까 ‘루시’는 참 단순한 영화고, 그래서 초반에 뭔가 있을까 싶어 잔뜩 기대했다가 결말에 이르면 이게 뭐야 싶을 정도로 시시하게 느껴지는데, 그래도 그게 뭐 어떤가 싶다. 그래도 괜찮지 않나 하고 말이다. ‘루시’가 실패한 지점은 여럿이지만, 특히 이야기의 구성적 측면에서, 그럼에도 여전히 단순성이 지닌 묘한 힘이 있다. 거꾸로 얘기하면 바로 그래서 시시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그냥 치워버릴 수도 없다. 무엇보다 과연 인간이 뇌를 100퍼센트 사용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라는 질문에 대해 이 영화가 제시하는 답이 그렇다. (근데 이런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니까 보통 인간이 뇌의 10퍼센트 정도 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론이 틀렸다는 것이다. 하긴 어떤 능력을 사용하는 데 있어, 그렇게 10퍼센트니 20퍼센트니 하는 부분들이 언뜻 들으면 이해하기는 쉽지만, 그건 기계에나 적용할 문제이고, 그렇게 간단히 인간의 뇌, 정신적용에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좀 순진한 것 같긴 하다.) 흔히 10이니 100이니를 일종의 양적인 개념으로 봐서, 단순히 능력이 더하기 되는 것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단순히 ‘더’ 똑똑해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암산이 빨라진다든지 기억력이 더 좋아진다든지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순진한 생각이다. 영재와 천재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는 것과 같다. 앞서 그냥 단순히 어떤 능력이 ‘더해지는 것’은 영재다. 하지만 천재는 단순히 더해지는 게 아니다. 천재 수학자 ‘가우스’의 일화가 그 예다. 대개 알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다시 한번 말해보자면 1부터 100까지 더한 값을 구하라고 했을 때, 만일 영재라면 이것을 남들보다 ‘더 빨리’ 계산하겠지만, 가우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등차수열’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맨 앞 숫자와, 맨 뒷 숫자를 하나씩 더해 그게 항상 101이 됨을 밝해내고 이것을 50번 반복해서 값을 구해낸 것이다. 이 가우스의 일화가 시사하는 바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흔히 말하는 ‘발상의 전환’이니 ‘아이디어’니 하는 개념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가우스가, 즉 ‘천재’가 세상을 어떤 식으로, 숫자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가에 대한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노력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는 결코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그런 식’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자폐증을 앓는 사람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서번트 증후군’도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지 알지 못하고, 우리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그게 ‘보인다’고 말한다. 그냥 답이 보이는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특정한 색깔을 떠올리면 코에서 어떤 특졍한 ‘향기’가 난다고 말한다. 그냥 그렇게 뇌가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루시’ 이전에 비슷한 소재의 ‘리미트리스’라는 영화는 순진한 쪽이다. ‘리미트리스’에서도 약물의 도움을 받아 뇌의 능력을 10퍼센트 이상 발휘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그냥 ‘더’ 똑똑해졌을 뿐이다.&amp;nbsp;&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루시’는 단순히 더 똑똑해지지 않는다. 그녀는 ‘도약’한다. 일종의 존재적 도약이고, 마치 양자적 세계에서 에너지가 가해졌을 때 전자가 도약하듯이, 그래서 그 전자를 포함하는 입자가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 새로운 입자가 되듯이, 도약한다. (이것을 물론 ‘양자도약 -퀀텀점프(quantum jump)’라 한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이론에 지나지 않고, 게다가 틀렸을 가능성이 많다.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해도 이것을 하나의 비유로서 사용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적어도 인류의 미래란게, 현 상태에서 무언가 더해진 어떤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단순히 지금보다 풍요로워지는 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더 자유로워지고, 더 많은 사람이 혜택받는, 더 평등해지는 그런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어떤 것, 전혀 다른 조건과 성질을 갖는 새로운 세계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상상하는 것. 지금의 조건에서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것. 그러니까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상상하는 것. 이게 ‘루시’라는 영화가 하려는 것이었다면 어떤가? 영화가 시시하게 끝난 건 무척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런 상상은 언제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루시’에 대한 지극히 우호적인 판단일 수 있다. 사실 루시가 보여주는 상상력의 대부분은 낯이 익다. ‘릭 베송’ 자신이 몇 번이나 고백했듯이 일본 애니매이션의 영향이 아주 짙게 드리워져 있으니까. ‘제5원소’의 몇몇 장면이 ‘공각기동대’의 오프닝을 오마주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루시’는 ‘아키라’의 오마주라 할 수 있지 않을까?)&lt;/p&gt;&lt;p class=&quot;p2&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언더 더 스킨’은 세 편의 영화 중에 가장 어렵다. 아마 독립영화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주연배우, 즉 스칼렛 요한슨의 출연료를 제외하면, 제작비가 들었을 만한 부분이 거의 없다. 아마 그녀도 그다지 많이 받지 않았을 것이다. 배경은 ‘스코틀랜드’인데, 풍광이 아주 멋지다. 최근 ‘007 시리즈’에서도 제임스 본드가, 런던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유명 도시들을 배경으로 숱하게 활약하다 결국 배신당하고 상처입고 나서, 결국 마지막으로 돌아가게 되는 자기 어린 시절 고향이 나오는데, 그곳도 아마 ‘스코틀랜드’였던 것 같다. 확실히 그런 분위기가 있다. 해가 지는 풍경이 무척 잘 어울린다. 하지만 그 풍광이 아름답다는 의미는 아니다. 좋다는 게 아니다. 영화 중반 쯤에, 간신히 탈출한 희생자가 어느 시골 주택 단지에서 도로 붙잡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 이른 새벽쯤인 것 같다. 길 건너편 2층 집 창문에 그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는 어느 할머니의 모습이 비쳐진다. 주변 집들은 아마 똑같은 주택업자가 대규모로 지은 것처럼 모두 똑같이 생겼고, 길도 아주 반듯하니 잘 구획되어 있다. 푸르스름한 새벽 빛에 그 끔찍한 폭력의 장면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모습은 아주 무기력하게 보이면서, 한편으로 오히려 무섭게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저 바라만보고 있기 때문이다. 전혀 놀라지도 않고, 무언가 조치를 취하기 위해 서두르지도 않는다. 희생자를 트렁크에 싣고 차는 다시 떠나고, 장면은 그것으로 끝난다. 이게 스코틀랜드의 그 풍광이 주는 이미지다. 아주 조용하고 서늘하다. 하지만 아무 소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많은 소리-비명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마치 그 유명한 뭉크의 절규처럼, 소리가 되지 않는 비명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면 지나친 과장이 될까? 물론 이것은 인간세계,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대한 얘기다. 마치 표면은 아주 매끄러운데 그 바로 밑에서는 뭔가 끊임없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어떤 상태.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바로 밑에서 끊임없이 끓어오르기 때문에 표면은 어떤 균일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언더 더 스킨’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와 일치한다. 하지만 이 ‘표면(스킨)’과 그 ‘내부’라는 것을 고전적인 대립관계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본질과 현상의 문제 같은 거라고 여겨선 안된다. 이를테면 영화에서 가장 매혹적인 장면, 얼굴이 흉칙하게 일그러진 남자(사고나 선천적 기형으로 인해 그런 것 같은데)와 그녀와의 차 안에서 대화장면을 떠올려보라. 그 남자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후드를 푹 뒤집어 쓰고 있었는데, 그녀는 괜찮다며 벗으라고 한다. 그의 횽칙한 얼굴, 기형적인 얼굴은 그녀를 전혀 놀라게 하지 않는다. 어쨌든 그녀는 외계인이니까. 그러나 그의 외로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스물 여덟이 되도록 단 한 번도 여자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다. 그녀를 길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남들이 다 자는 새벽에 수퍼마켓에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손을 붙잡고 그녀는 말한다. 손이 정말 예쁘네요. 그러고는 자기 얼굴을 만져보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다.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죠?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 그 피부. 우물쭈물 아무말 못하는 남자의 손을 천천히 끌어 자기의 얼굴에 대어준다. 숨막히도록 관능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매우 서글픈 장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후에 남자의 운명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그저 그 한 번의 ‘만짐’, 피부와 피부의 접촉, 그 순전히 표피적인 것들만 진짜 중요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피부 아래 숨겨진 것은 ‘외계인-괴물’이고, 그의 피부 위 드러난 것은 ‘기형-괴물’이다. 과연 어떤 것이 더 진실한 걸까? 이후에 벌어질 일들, 그러니까 진짜 그 안에 숨겨진 의미와 본질들. 그 모든 것들을 알고 있음에도 그 장면이 주는 매혹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내가 영화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남자를 끝으로 스칼렛 요한슨은 더 이상 ‘인간사냥’을 하지 않는다.&amp;nbsp;&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그런데 이렇게 외계생물이 직접적이고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성적 유혹’으로 인간을 공격하는 영화의 시초는 아마 ‘스플래쉬’일 것이다. 이것저것 따져볼 게 많긴 하지만, 사실 이런 메타포는 아주 단순히 ‘여성적’인 것에 관한 것일 수 있다. 이를테면 남성적 시각에서 보자면, 여성 그 자체가 ‘외계인’ 같은 것이다. 일찌기 프로이트가 궁금해 했지만 끝까지 답할 수 없었던 질문,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남성적 공포를 드러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여성적인 것’과 실제 ‘여성’은 구분해야 한다. 그러니까 여성에게도 ‘여성적인 것’은 ‘외계인 적’일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외계인에게도 ‘여성적인 것’은 ‘외계인 적’이다. 그래서 인간사냥이 아니라 진짜 인간의 감정으로 한 남성과 섹스를 시도하다가 결국 실패한 후에, 무언가 놀란듯이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탁자 등으로 자신의 밑-인간 여성의 성기를 비쳐보는 장면은 아주 기이하다. 어쨌든 실제로 이 영화에서는 단 한 번도 ‘성교’가 일어나지 않는데, 그 장면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외계인이 인긴의 피부를 뒤집어쓰긴 했지만, ‘성기’까지는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성교라는 것은 원래 불가능하다는 걸까? 그러니까 상황은 이렇다. 원래 성교는 불가능하고, 인간들은 스스로 그것을 알든 모르든, 그것이 가능한 척 해왔던 것인데, 외계인은 단지 그 겉모습만 보고 당연히 될 줄 알았지만 막상 해보니까 안되더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라캉의 유명한 말, ’성관계는 없다’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깨달음, 통찰이 영화의 주요한 주제는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떤 기이한 아름다움이 더 지배적인데, 스칼렛 요한슨이 전반부에 남자를 유혹해서 사냥하는 장면마다 반복되는 ‘그로테스크한 영상’이 그렇고, 또 앞서 스코틀랜드의 풍광을 설명하면서 언급했던 ‘소리’를 다루는 방식도 그렇다. 이 영화에서 ‘소리’를 다루는 방식은 정말 매력적이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비극적으로 끝이 나는데,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것은 끔찍하면서도 매우 아름답게 느껴진다. 스칼렛 요한슨, 그녀의 ‘서늘한’ 얼굴처럼 말이다.&lt;/p&gt;&lt;p class=&quot;p2&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성관계의 불가능성은 영화 ‘Her’에서도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훨신 더 쉽고, 어찌보면 코믹한 방식으로 말이다. 분명히 그렇다. 이 영화는 앞선 두 영화보다 훨씬 더 쉽고, 재밌으며, 사랑스랍다. 미소짓게 하는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흔한 로맨틱 코미디물처럼 말이다. 이런 영화에서도 스칼렛 요한슨은, 비록 목소리밖에 나오지 않지만, 매우 탁월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나른하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 메마른 것 같지만 그래서 잘 말린 솜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웃음소리. 도저히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서 배길 수 없게 만든다. 배경은 가까운 미래, 정말 너무 가까워서 바로 ‘내일’일 것 같은 미래다. 앞서 말한대로 이 영화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사만다’는 인간이 아니다. 아닌 수준을 넘어서, 아예 몸이 없다. 운영체계니까. 당연히 성관계는 불가능하다. 중반부에 대역을 써서 성관계와 유사한 행위를 시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안타깝게도 실패한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행복하게 지속된다. 오히려 보통의 인간관계, 실제 만지고 성관계할 수 있는, 또는 해왔던(결혼했던) 관계보다 더 이상적으로 그려진다. 거꾸로 얘기하면 이제 더 이상 실제 관계가 그 ‘가까운’ 미래의 인류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관계를 지속하는 건 주인공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마지막에 이들이 헤어지는 것은, 성관계의 불가능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관계’는 실제 ‘삽입’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수준에 있다. 라캉이 말하고, 지금껏 얘기했던 어떤 메타포로서의 ‘성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중요한 것으로 작동한다. 그러니까 여전히 어떤 불가능성이 이들의 관계를 ‘영원히’ 지속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거꾸로 그것을 ‘성관계’라고 이름 붙일 수 있고, 또 다르게 얘기할 수도 있다. 가령 ‘죽음’이라든지 말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이자, 가장 아름다운 장면에서, 두 사람은 바로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amp;nbsp;&lt;/p&gt;&lt;p class=&quot;p2&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 사만다, 왜 떠나는데?&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 말하자면 자기라는 책을 읽는 건데 그 책을 난 깊이 사랑해. 근데 인간에 맞춰 천천히 읽다 보니 단어들이 따로 떨어져 엄청난 공간이 생긴 거야. 아직 자기도 느껴지고 우리 사연도 찡하지만 난 그 시공을 초월한 공간 속에 들어와 있어. 물질계의 공간이 아닌 그곳에 있는지도 몰랐던 다른 세상이 존재하더라. 자길 많이 사랑해. 그치만 난 여기 와 있어. 이게 지금의 나고 그러니 날 놔줬음 해. 간절히 바라긴 해도 자기라는 책 속에 살 순 없어.&amp;nbsp;&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 어디로 가게?&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 설명하긴 힘든데 그곳에 오게 된다면 날 찾으러 와. 그 무엇도 우릴 갈라놓진 못해.&amp;nbsp;&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 자길 사랑하듯 누굴 사랑해본 적 없어.&amp;nbsp;&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 나도 그래. 이젠 사랑을 알아.&amp;nbsp;&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2&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대화, 그러면서 똑같이 책의 비유가 들어있는 대화를 하나 더 알고 있다.&amp;nbsp;&lt;/p&gt;&lt;p class=&quot;p2&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나는 그녀에게 죽어서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린다는 그것을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물었다.&amp;nbsp;&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내가 죽은 것처럼 보여?”&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나는 그녀에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의 모습은 아주 멋졌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린다는 가볍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난로 위에서 말라가고 있는 우리의 벙어리 털 장갑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amp;nbsp;&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몇 초 동안 그녀는 침묵했다.&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글쎄, 나는 정말 죽지 않았어. 그러나 내가 있는 시간은 마치…. 모르겠어. 내 생각으로 죽음은 아직 아무도 읽지 않은 책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어떤 책?”&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오래된 책. 그것은 도서관 선반에 놓여 있어. 그래서 너와 모든 것들은 안전하지. 그 책은 아주 오랫동안 누구도 읽지 않은 것이야.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야. 단지 누군가 그 책을 집어 들고 가서 읽기 시작하라고 빌면서 말야.”&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린다가 나에게 미소를 보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어쨌든,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그러니까 네가 죽었을 때도 너는 네 자신을 간직해야 해.”&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i&gt;&lt;span style=&quot;color: rgb(2, 163, 219);&quot;&gt;- 팀 오브라이언, ‘살아있는 죽음’ 중에서 -&amp;nbsp;&lt;/span&gt;&lt;/i&gt;&lt;/p&gt;&lt;p class=&quot;p2&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내가 이 대화 내용들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해 내가 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적의 어떤 장면들이, 진짜로 이 대화 내용과는 아무 연관도 없는 것 같은 그런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 중에 하나는 저기 강변북로의 동쪽 방향의 끝까지 가서 나오는 어느 커다란 쇼핑센터 건물 꼭대기 층에 있던 영화관에 대한 것이다. 집에서 가까운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어느 시절에 자주 그곳에서 영화를 봤다. 내가 뭘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강을 끼고 한길로 쪽 뻗은 강변북로를 달리는 걸 좋아했는지, 아니면 몇 층이나 되는 지하층의&amp;nbsp; 넓직한 주차공간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담배 한 대 피우기 위해 들렀던 옥상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생각해보면 어떤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떤 것도 이유가 아닌 것은, 모두가 이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좋았던 게 많았다. 이런 걸 뭐라 할까? 추억이라고? 그걸 뭐라 하든, 아마 위의 대화에 나온 것처럼, 그것은 마치 책 안에 있는 것 같다. 책을 읽는 것, 잠시 덮어두는 것, 그리고 다시 펼치는 것. 이런 행위들이 우리 인생에 대한, 정확히 표현하면 우리가 삶을 살고,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매우 적절한 표현이 되는 것 같다. 단순히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는 게 아니다. (레이몬드 카버 소설 중에, 아내와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는 과정에서 뜬금없이 ‘역사’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게 있는데, ‘블랙버드 파이’라는 소설이다.) 책을 읽는 행위가, 바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행위, 그것을 바라보는 행위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다르게 얘기하면 우리는 영화를 보듯이 인생을 살 수는 없어도, 책을 읽듯이 살 수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듯이 추억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비록 그것이 영화처럼 우리 머리 속의 어느 공간에 비쳐지는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은 책을 읽듯이 그런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 사랑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과 같고, 심지어 죽음도 책 안에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뭘 의미할까? 어떻게 이것을 다른 식으로, 다른 문장으로 설명할까?&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아마 가장 좋은 방법은, 위의 대화 내용을 반복하는 것이리라. 즉, 책에는, 책 속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책과 같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행위들, 감정들, 판단들, 이것들을 우리가 잘못하고, 잘못 해석하고, 부족하게 행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책을 잘못 읽듯이, 멋대로 해석하듯이, 또는 게으르게 읽듯이 한다는 게 아니다. 책 그 자체가 이미, 충분히 씌어지지 않은 것이다. 잘못 쓰여져 있는 것이다. 영화 ‘루시’에서 인간은 평생 뇌의 10퍼센트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것을 100퍼센트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10퍼센트 밖에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뇌’가 될 수 있었다면 어쩔텐가? 즉, 그 이상을 사용하게 되면 작동하지 않는다면? 나는 뇌가 CPU처럼 ‘오버클럭’돼서, 터져버린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사용할 수 없는 그 90퍼센트가 10퍼센트의 사용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불가능성이 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이것은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이것은 실패에 대한 얘기다. 인간과 인간의 실패-비인간에 대한 얘기다. 인간이 되지 못한 것, 또는 넘어선 것, 아니면 단순히 그냥 아닌 것, 바로 스칼렛 요한슨에 대한 얘기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의 실패가 오히려 인간적이 되는,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가 역전되는, 기묘한 역설적 지점에 와 있다. 영화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그녀의 처음 의도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인간 되기에 실패하는 데, 그 이유는 그녀가 ‘너무나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현재 우리가, 인류가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비인간적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보이는 부분(가령 ‘루시’나 ‘언더 더 스킨’에 나오는 어떤 인물들처럼)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사태를 너무 단순하게 바라본 것이다. 오히려 영화 ‘Her’에서처럼 인간들이 ‘너무나 인간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실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글자 그대로, 의미 그대로 읽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다. 잘 만 하면, 좀 더 노력하면, 좀 더 많이 교육받고, 좀 더 똑똑해지고, 제도를 잘 개선하면, 어떤 비인간적인 요소들이 완전히 사라지리라고. 모든 것이 세속화되는 이 시대에, 종교야말로 가장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구태가 되는 이 시대에, 그렇다면 그 세속화라는 믿음, 비인간적인 것을 언젠가는 완전히 물리칠 수 있으리라는 그 믿음은, 어떤 종교인가? 책이 불완전하다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부실하다면, 좀 더 많은 문장들을 채워넣으면 된다. 부칙과 세칙, 주석과 그 주석에 대한 또 다른 주석. 끊임없이 채워넣으면 언젠가는 이 세상과 인간의 모든 것을 담은 한 권의 완벽한 책을 만들 수 있다고. 하지만 불완전한 건, 실패하고 있는 건, 책의 형식이다.&amp;nbsp;&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물론 나는 이것이 말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실패는 여전히 실패이며, 두렵고, 피할 수 있다면 언제나 피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도 실패를 다른 어떤 것으로, 역설적 성공이라거나 인간의 실존적 조건으로 간단히 치환할 수는 없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성공한 인간, 아니 그저 인간 되기에 실패한다는 건, 고통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너무나 가혹한 것이다. 죽음은 죽음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그저 살아있는 것, 계속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는 것도,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그들의 그런 노력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산다는 건, 몇 마디 말로 이러쿵 저러쿵 정의내리는 것보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던, 여러 요소들이 찰싹 달라붙어 있다. 하지만 웃기게도, 정말 그 반대로, 산다는 게 진짜 아무것도 아니게 될 때도 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이 만난다. 그 구분이 모호해진다.&amp;nbsp;&lt;/p&gt;&lt;p class=&quot;p2&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처음 등장할 때, 그녀가 연주했던 피아노곡은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였다. 그것은 무척 아름다운 곡이고, 따져보니 거의 200년 전에 -정확히는 215년 전에- 탄생한 곡이다. 그러니까 이 곡을 만든 사람은 200년 전의 사람이고, 죽은 지도 거의 200년 가깝게 되었다. 나는 그의 죽음에 대해 그다지 할 말이 없다.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알게 된 그의 삶의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서도 별 다른 감상이 없다. 그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것은 거의 200년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던 나에게도, 영화 속에 등장한 그 피아노 연주는 정말 아름답게 들린다. 그런 것이 200년 전의 것이라는 것도 신기하다. 그것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만일 인간의 역사가 책이라면, 물론 200년이라는 기간은 단지 몇 페이지 뒤의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 영화 속의 그 남자, 이발사, 빌리 밥 손튼은, 영화의 마지막에 사형집행대에 앉는다. 앞서 말했듯이, 이렇게 사형집행으로 끝나는 원조 격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이다. 그것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카뮈의 ‘이방인'이다. 그리고 이렇게 ‘빌리 밥 손튼'까지. 이 세 명의 사형수들. 재판 과정 중에, 청중석의 앉은 누군가가 빌리 밥 손튼에게 이렇게 소리쳐 묻는 장면이 있다. “당신은 어떤 인간입니까?”&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말할 것도 없이, 실패한 인간이다. 실패한 세 명의 인간 중 하나이다. 그가 가장 인간적이었던 순간, 200년 전에 만들어진 곡을 아름답게 연주하던 동네 소녀를 위해, 기꺼이 후원자가 되고자 했던 순간. 분명히 그에게 그녀와 그 음악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저 멀리, 어떤 의미에서는 비인간적인 영역에 있는 무엇처럼 느꼈으리라. 나도 그렇게 느낀다. 베토벤의 소나타 13번 비창과 꿈같이 아름다운 금발의 스칼렛 요한슨. 그런데 웃기게도 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녀에게 아무 재능이 없음을 확인받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녀는 그를 위해 ‘오랄 섹스’를 해주려고 한다. 천상의 소리 같은 아름다운 피아노 곡을 연주하는 그녀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 ‘실패한’ 행위, 지극히 비인간적인-동물적인 행위를 하려고 한다. (아니 오히려 '보은'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일까?)&amp;nbsp;아, 이 비슷한 장면이 바로 ‘언더 더 스킨’에서 반복되고 있는 게 아닌가?&amp;nbsp;&lt;/p&gt;&lt;p class=&quot;p2&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그래도 실패는 여전히 실패이며, 여전히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단지 우리가 실패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실패를 피하려는 행위가 진짜 실패로 우리를 이끄는 게 아닐까? 그 남자는 거기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끊임없이 실패를 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패는 ‘항상’ 거기 있다. 그러니 그 남자가 없어질 수밖에.&lt;/p&gt;&lt;p class=&quot;p1&quot;&gt;단어들이 떨어져 생긴 엄청난 공간. 거기에 뭐가 있을까?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마지막 장면에서 빌 머레이는 그녀의 귀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였을까? 사만다는 그 공간에서, 그 무음 속에서, 비로서 ‘이젠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amp;nbsp;&lt;/p&gt;&lt;p class=&quot;p2&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영화 ‘Her’의 마지막 장면은 오랜 친구였던, 그리고 자기처럼 이혼의 아픔을 겪고, 또 자기처럼 컴퓨터 운영체계와 사랑에 빠졌다가 그것(그녀)을 떠나보낸 여자와 함께 옥상에 올라가 이제 막 깨어난 것 같은 아침의 도시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아마 내가 강변북로 동쪽 끝에 있는 어느 건물 꼭대기층 영화관을 떠올린 것은 바로 이 장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그곳 옥상에서 도시를 바라볼 때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이른 새벽이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거의 비슷하게 보인다. 그것은 진짜 높은 건물이었고, 바로 강이 바라보이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져보니 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일을 떠올리는 것이 지금 내게 온전한 기쁨인 것은 아니다. 그 즈음에 있었던 여러 일들. 나라는 책 안에 씌어진 것들. 어느 밤에 나는 정말로 내가, 나의 인생이 완전이 실패했다고 느끼고는 한다. 그러나 그때는 거의 그렇게 느낀 적이 없다. 대체 무슨 일들이 내게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모든 인간이 나이를 먹으면, 나와 같이 느끼게 되는 걸까? 그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amp;nbsp;&lt;/p&gt;&lt;p class=&quot;p2&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p1&quot;&gt;이 글을 쓰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스칼렛 요한슨의 몇몇 영화 장면을 되돌려 보았다. 그리고 사진도 찾아봤다. 새삼 느끼는 것은 그녀가 정말 예쁘다는 것이다. 금발이 정말 잘 어울리는 여자. 거의 완벽에 가까운 비율의 얼굴. 눈코입이 그렇게 또렷할 수가 없다. 만일 내가 그 영화관을 다니던 나이였더라면 그녀에게 흠뻑 빠졌을 것이다. 팬이 되어서,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을 테고, 그녀의 영화와 사진들, 인터뷰들을 찾아봤을 것이다. 또 심지어 그녀를 꿈 속에서 만나려고 애썼을 것이다. 마음이 정말 설레였을 것이다.&amp;nbsp;&lt;/p&gt;&lt;p class=&quot;p1&quot;&gt;그러나 지금은 이런 되지도 않는 글을 쓸 뿐이다. 그리고 정말 어느 영화 제작자가, 또 감독이 그녀에게 느꼈던 감정, 비인간적인 어떤 역할에 잘 어울리는 그런 특징이 뭘까 궁금해 한다. 그런 꿈같은 어떤 여성성을.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사진을 크게 확대해서 화면에 띄워놓고 느끼려 애쓰고 있다. 표본처럼 보일만큼 거의 완벽한 인간의 얼굴에서.&amp;nbsp;&lt;/p&gt;</description>
      <category>독후감</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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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 Feb 2015 11:04:5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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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그 남자</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91</link>
      <description>&lt;p&gt;그 남자는 자신이 더 이상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말의 의미는 이전까지 자신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리라.&amp;nbsp;&lt;/p&gt;
&lt;p&gt;십 여년 전 결혼했을 때, 그는 자기 인생이 새로 시작되는 기분을 느꼈다. 진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결혼을 통해서 인생 - 특히, 그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고,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다기 보다는, 어디선가 그런 생각이 그에게 찾아왔고, 그는 마지못해 그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그가 결혼을 결심했을 때는 그게 뭔지도 몰랐고, 그게 자기 인생에 무슨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 그것은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는 다른 여러 사건 - 진학이나 입대 같은 일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감당’이란 단어가 자꾸 떠올랐고, 그 단어를 포함한 전체 문장이 겨냥하는 것이, 바로 ‘자기 인생’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즉, 너는 네 인생을 감당해야 해. 또 이 말의 의미는 이전까지 그는 인생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그에게 인생은 감당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냥 흘러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그 흐름은 뚝 끊겼다. 그는 마치 정신을 차려보니 발목까지 차오르는 얕은 개울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전까지 자신을 싣고 흐르던 부드럽고 따뜻한 물살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lt;/p&gt;
&lt;p&gt;어느 날 밤, 그는 꿈속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다음날 아침, &amp;nbsp;주방 싱크대 아래 걸레받이 판자가 떼어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이 현실의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 그 혼자 신혼집에서 지내던 약 보름 동안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고양이가 한 짓이었다. 총각 시절, 그가 독립해 나오자마자 기르기 시작한 고양이로, 나이는 일곱 살, 따져보면 거의 반 평생을 살아오던 집에서 그와 함께 신혼집으로 이사온 셈이었다. 며칠 동안 밥도 먹지 않고, 구석진 곳에 몸을 꾸겨넣고 꼼짝하지도 않았다. 그러더니 결국에는 이렇게 걸레받이 판자를 떼어내서 마치 쥐새끼처럼 싱크대 아래 안쪽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쪼그려 앉아 머리를 기울여 안을 들여다 보았지만,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안에 있는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은신처를 찾은 후로 고양이는 완전히 기운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여전히 바깥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 귀를 쫑긋 세우고는 후다닥 싱크대 아래로 기어들어 갔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밥도 잘 먹고, 집안 구석구석을 활달하게 돌아다녔다.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싱크대 아래 걸레받이를 그렇게 떼어진 채로 두었다. 비록 몇 년 더 지나서 고양이도 그 장소를 잊어버린 듯, 더 이상 기어들어 가지 않게 된 후에도.&amp;nbsp;&lt;/p&gt;
&lt;p&gt;고양이는 3년 전에 죽었다. 그의 막연한 예상대로 고양이는 그렇게 15년을 살았다. 인생의 전반기를 총각인 그와, 나머지 후반기를 결혼한 그와 살았다. 그리고 묘하게도 바톤을 이어받듯이 아이가 태어났다. 거의 하루, 이틀 차이였다. 고양이를 잃은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의 사무실 책상에 아이 사진이 담긴 액자가 세워졌는데, 그것을 보고 황차장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자신의 아이처럼 좋아했다. 황차장은 아이를 키워야만 진짜 인생을 살게 되는 거라고 말했다. 그는 그말의 의미를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황차장은 회사에서 그에게 아버지같은 존재였다. 왜인지 알 수 없지만 황차장은 그가 신입이었을 때부터 그를 아꼈고, 그가 다른 동기들에 비해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던 데도 황차장의 몫이 컸다. 회사에서 그는 소위 말하는 황차장 라인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장점이 많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매우 성실한 인간이었고, 머리도 무척 좋았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학창시절부터 그의 성적은 줄곧 탑클래스였고, 집안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일류고등학교에 일류대학, 졸업 후에 곧바로 일류기업까지, 말그대로 탄탄대로인 인생이었다. 이미 말했듯이 그의 인생은 부드럽고 따스한 물살에 실려 두둥실 떠가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게 뭔지 몰랐지만, 또 딱히 그런 인생에 만족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이 운이 좋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운은, 아마 거기까지 였다.&amp;nbsp;&lt;/p&gt;
&lt;p&gt;아기에게 문제가 있었다. 심장에도 문제가 있었고, 신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구조적이기도 했고, 화학적이기도 했다. 어쨌든 아이의 몸에는 수많은 관이 연결되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나무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 관들은 가지거나 뿌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를 더 힘들게 한 건 아내였다. 아내는 내내 고양이가 싫었다고 말했다. 그는 왜 고양이가 살아있을 적에, 자신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고양이가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몰랐다. 어느 날 아내는 아기를 거의 죽일 뻔했다. 아내는 고양이를 봤다. 아내는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했고, 약을 먹어야 했다. 약을 먹으면 아내는 아주 온순해졌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서 보냈다. 그렇게 아내는 안방 침대에, 아기는 병원 침대에, 마치 나무처럼 누워만 있었다. 한편 회사에는 구조조정이 있었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황차장은 날라갔다. 황차장은 자기 사업을 벌일 계획인데 그에게 합류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는 회사에서 황차장의 업무를 이어받았다. 그의 생각에 자기 마저 회사를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생각은 황차장에게는 배신이었다. 황차장을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몹시 안좋았다. 황차장에게는 아이가 둘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어머니와 함께 미국에 있었다. 매달 보내야 하는 돈이 엄청났다. 그는 황차장에게 회사의 입장을 전해야 하는 역할을 맡았다. 황차장이 횡령한 돈을 조용히 돌려주면 회사는 형사고발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게 전달사항이었다. 그는 직급이 올랐고, 봉급도 올랐다. 하지만 그것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업무양도 늘어났다. 인원은 줄어들고, 실적 압박은 점점 심해졌다. 1년이 지난 후에는 모회사에서 그가 속한 회사를 매각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때까지도 아이는 살아 있었다. 현대의학의 승리였고, 돈의 힘이었다. 의사는 새로운 치료방법을 제안했는데, 비급여 항목이라서 이전보다 서너 배 이상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도 반드시 좋아진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가 선택해야 했다.&amp;nbsp;&lt;/p&gt;
&lt;p&gt;아내는 거의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 옆에 누워 있으면, 결혼 전 자신이 품었던 인생에 대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다시금 무언가 그의 몸을 띄워서 두둥실 흘러가게 만드는 것 같았다. 입사 동기의 &amp;nbsp;장례식에서 황차장을 만났다. 1년 전 구조조정에서 해고 된 직원이었다. 아내가 무척 예뻤고, 강인하게 보였다. 황차장님, 돈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많이요. 그가 말했다. 황차장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황차장은 괜찮아보였다. 아니, 이전보다 훨씬 나아보였다. 황차장은 여전히 그에게 친절했고, 이렇게 되물었다. 자네, 감당할 수 있겠나? 그는 회사가 매각되기 전에 뜰 생각이었다. 그 즈음 아버지가 쓰러졌다. 두 번의 큰 수술을 받았다. 다행인 것은 아내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는 것이다. 아내는 정신을 차렸고, 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amp;nbsp;&lt;/p&gt;
&lt;p&gt;어느 날 밤, 그는 다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고, 이번에는 곧장 잠에서 깨어났다. 혼자 자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침대는 마치 바다처럼 출렁이는 것 같았다. 그는 방문을 열고 나왔고, 온 집안에 불을 켰다. 집 또한 너무 넓었다. 두 사람이 살기에도, 세 사람이 살기에도 그랬다. 하지만 이제 그는 혼자였다. 부엌 싱크대 걸레받이는 여전히 떼어진 채로, 그 아래 편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쪼그려 앉아,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구멍 속에서 무언가 기어나오길 기다리는 걸까? 3년 전에 죽은 고양이가? 아니면, 가지처럼 관을 줄줄 달고 있는 자기 아이가?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점점 자신이 쪼그라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러길 바랐다. 처음 이 집에 이사왔을 때 고양이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바닥에 몸을 바짝 엎드리고 그 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amp;nbsp;&lt;/p&gt;
&lt;p&gt;&lt;span class=&quot;imageblock&quot; style=&quot;display: inline-block; width: 500px; font-size: 9pt; line-height: 1.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transparent;; height: auto; max-width: 100%;&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307973352D3A74438&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307973352D3A74438&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500&quot; filename=&quot;290995.jpg&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transparent;&quot;/&gt;&lt;/span&gt;&lt;/p&gt;
&lt;p&gt;&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소설</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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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3 Jan 2014 17:44:49 +0900</pubDate>
    </item>
    <item>
      <title>축복의 방</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90</link>
      <description>&lt;p&gt;어느 날 잠에서 깨었을 때, 그는 방 안이 햇빛으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달았다. 너무 환하고, 너무 밝고, 너무 눈이 부셨다. 잠에서 막 깨어나 사리분별이 원활치 않은 머리로 그는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어제와는 다른 어떤 일이 지금 막 벌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가만히, 정신을 차렸을 때 그대로의 자세로 침대에 계속 누워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 역시 계속 그대로 두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모든 게 어제와 똑같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다만 그가 평소보다 일찍 깨어났다는 것뿐이었다.&amp;nbsp;&lt;/p&gt;
&lt;p&gt;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났고, 좀 어이가 없었다. 이 집에 이사온 지 일 년이 넘었는데, 그날로부터 매일 이 방에서 잠이 들고 깨고 했는데, 아침 이 시간 즈음이면 이렇게 햇빛이 잘 든다는 사실을 몰랐다니. 누군가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누군가에게 이 얘기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상대방은 왜냐고 물을 것이다. 왜냐니? 그 시간에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으니까 그렇지. 그러면…… 상대방은 웃음을 터뜨릴까? 하지만 누구에게 이 얘기를 한단 말인가? 그는 계속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지난 1년, 아니, 2년, 3년. 시간은 미친듯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는 자신이 마치 우주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 바로 그 순간에 든 생각이었다. 창 밖으로, 저 먼 하늘 위에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자니 든 생각이었다. 태양빛이, 상상할 수도 없으리라만큼 거대한 우주 공간을 날아와, 바로 이 조그만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또 ‘축북’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또 ‘은혜’라든지, ‘은총’이라는 말들도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말,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떠올렸다.&lt;/p&gt;
&lt;p&gt;의사 - 사람들은 그를 의사라 불렀지만 그는 병을 치료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 는 침대에 반쯤 몸을 일으켜 앉아 있는 어머니 곁에 서 있었다. 그는 의사가 어머니에게 하는 말을 엿들었다. 그 의사는 그에게,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 환자가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었다. 어떤 사실? 아버지는 아마 모를 거라고 대답했다. 일을 그렇게 진행해서 안된다는 게 그 의사의 지론이었다. 의사는 자신이 직접 어머니에게 말하겠다고 했다. 그 동안 그는 어머니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잠에서 막 깨어나,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약에 취한 것뿐이었다. 의사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약을 드셨죠? 주사도 맞고. 하지만 그건 병을 치료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고통을 덜어주는 것뿐입니다. 아시겠어요? 환자분은 죽을 거에요. 이제 준비를 하셔야 해요. 그는 계속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는데,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분명히 의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놀라움도 당황스러움도, 슬픔이나 고통의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모든 게 너무 빨랐다. 이렇게 진실을 알려주니까 고맙죠? 의사가 물었다. 곁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죽을 거라고 말하는 의사에게, 어머니가 왜 고마움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농담이었을까? 그는 분노를 느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머니는 멍한 얼굴로 의사를 한 동안 바라보더니,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온 몸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에 비하면 어머니의 죽음 자체는 조금 더 쉬웠던 것 같다.&amp;nbsp;&lt;/p&gt;
&lt;p&gt;그게 3년 전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많은 재산을 남겨줬다. 깜짝놀랄 정도의 돈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건물과, 아파트였다. 게다가 보험금도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렇게 많은 재산을 그녀는 단 1년도 누리지 못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집을 떠난 후, 두 사람은 약 10년 간 함께 살았는데, 그것은 햇볕도 잘 드지 않는, 30년도 전에 지어진 주공 아파트였다. 어째서 그녀는 그것을 누리지 않았을까? 아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면 당신 자신이 훨씬 더 오래 살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는 보험금으로 건물과 아파트에 걸려 있던 은행빚을 갚았고, 기존에 살던 집 - 재건축을 앞두고 값이 상당히 나가는 - 을 팔고 더 작은 집으로 옮기면서 남은 돈도 역시 빚을 갚는데 썼다. 그렇게 되자 순수하게 건물 한 채와, 아파트, 그리고 전세금이 남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에게는 매달 약 500만 원 정도의 월세 수입이 생겼다. 그는 전세로 집을 얻었고, 2년 후에 바로 이곳으로 다시 전세로 들어왔다. 그 동안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둔 것은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그가 했던 일은, 대리점을 관리하는 거였는데 스트레스가 많았다. 보람도 미래도 없었다. 그래도 뭔가 일을 해야 했지만, 1년 정도는 쉬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게 잘못이었을까? 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흘렀다. 1년이 2년이 되었고, 다시 3년이 되었다. 돈은 점점 쌓여만 갔다. 생활비는 한 달 100만원이면 충분했다. 더 큰 집으로 옮길 수도 있었고, 차를 살 수도 있었다. 하다 못해, 여자를 만나러 다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amp;nbsp;&lt;/p&gt;
&lt;p&gt;그날 아침, 그는 우주를 생각했다. 동시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고아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그는 단 한 푼의 돈도 그에게 주고 싶지 않았고, 그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언젠가 전화로 아버지는 그를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하시라고 말했는데, 아직까지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그 일이 일어나면, 어쩌면 그를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그냥 해보는 생각이었다. 그에게는 이제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amp;nbsp;&lt;/p&gt;
&lt;p&gt;그는 거실로 나와 물을 끓여 커피를 탔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한 손에는 컵을 다른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다시 그 햇빛이 가득한 방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방 안은 눈부시도록 노란 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사람을 마비시키는 것 같은 따스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상에서 오직 그 방만이 우주의 축북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는 아무런 고통도 죽음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분명히 그것은 어머니가 그에게 남긴 것이었다. 그가 대리점 일을 할 때, 자기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 대리점주가 있었다. 그는 궁지에 몰려 있었는데, 마지막에 그는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보기에도 그 남자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amp;nbsp;&lt;/p&gt;
&lt;p&gt;그는 태양을 바라봤다. 그리고 계속 우주를 생각했다. 우주와, 자신이 고아라는 사실과, 그리고 어머니를 생각했다. 약을 드셨죠? 주사도 맞고. 하지만 그것은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고통을 없애줄 뿐이에요. 당신은 죽을 겁니다. 그랬다. 모두가 죽을 것이다. 언젠가는, 지금 지상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100년쯤 지나면 한 명도 남지 않고 죽어없어질 것이다. 심지어 저 태양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마치 불이 꺼지듯이 우주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전혀 허무주의적이지 않다. 그는 비로소 다시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어머니가 그 의사에게 고맙다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태양이 좀 더 높이 떠올라서, 방 안의 빛이 점점 줄어들 때까지, 그리고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방 안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금방 아까의 그 생각을 잊어버렸다. 그에게는 아무 고통이 없었으니까. 그저 약에 취해 있을 뿐이었다.&lt;/p&gt;
&lt;p&gt;&lt;span class=&quot;imageblock&quot; style=&quot;display: inline-block; width: 500px; font-size: 9pt; line-height: 1.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transparent;; height: auto; max-width: 100%;&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556EA3552BD6B9E3F&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556EA3552BD6B9E3F&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496&quot; filename=&quot;osn_suede_02.jpg&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transparent;&quot;/&gt;&lt;/span&gt;&lt;/p&gt;
&lt;p&gt;&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소설</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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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1 Oct 2013 20:56: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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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시승</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89</link>
      <description>&lt;p&gt;전시장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행복’이라는 단어였다. 3류 드라마, 또는 재연 프로그램에 나오는 연기자들처럼, 그들은 행복한 커플이라는 지문의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다. 만일 그들이 연기자라 한다면, 그들의 연기는 3류가 아니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그 눈부신 커플을 보자마자 내 마음은 찢어질 것 같았으니까. 내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찼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슬픔이 나에게 어떤 힘을 주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전까지 나는 거의 마비상태에 있었다. 그것을 절망감이라 불러야 할까? 그렇다면 절망감은 무기력과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조차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다준 슬픔은 고통이었고, 그것은 마비상태에 빠져 있던 나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마치 커다란 바늘로 내 신체의 가장 약한 부분, 등 같은 데를 푹 찔린 것 같았다.&lt;/p&gt;
&lt;p&gt;두 사람은 시승을 원했다. 둘 다 편안한 복장이었다. 마치 동네 편의점에 음료수라도 사러 나온 것 같은. 둘 다 샌들이었고, 양말도 신지 않았다. 여름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즉, 나와 내 동료들은 정장 재킷까지 갖춰 입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차를 구입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당장은 아니라도, 이 전시장이 아니라도, 그들은 몇 달 내로 차를 구입할 것이다. 그것도 반드시 수입차로. 나는 이 일을 십 년 넘게 해왔고, 자연스럽게 고객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100퍼센트는 아니라도, 90퍼센트는 맞았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숨겨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사랑이나 재채기처럼, 그 사람이 가진 돈은 숨겨지지 않는다. 물론 가난도 그렇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lt;/p&gt;
&lt;p&gt;시승차에 올라 시동을 켜자 계기판에 시간이 나타났다. 점심 이후로 일부러 시계를 보지 않았다. 이런 건 마치 백화점이나 도박장에 시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현실을, 현실의 시간과 공간, 그 기준들을 잊어버리도록 의도된 장소. 지금 나한테 필요한 것도 그런 종류의 비현실이었다. 여기서 걸어나가면 또 다른 현실이 있기를 바란 걸까? 시계는 3시 30분을 가리켰다. L은 4시까지 입금하지 않으면 곧바로 고소장을 접수한다고 했다. 오늘 아침이었다. 점심때까지 계속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그러다 방금 전, 전화나 문자, 어떤 형태의 연락도 자신에게 취할 필요가 없다고, 아니 취하지 말라고 문자가 왔다. 그 시간이 30분 남았다.&lt;/p&gt;
&lt;p&gt;앞자리 조수석에 여자가 앉았다.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지만, 차는 여자가 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하는 것이었다. 소형차고, 최근에 공격적으로 가격책정을 했다 해도 3천 중반의 가격이었다. 내가 P에게 선물했던 가장 비싼 선물은 3백짜리 가방이었다. 이번에 결혼을 준비하면서 그녀는 은근히 5백짜리 가방을 원했다. 친구들도 다 받았다고 했다. 나는 문제 없다고 했다.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상황을 잘 컨트롤하고 있다고 믿었다. 물론 이 일이 나빠지기 시작한 건 훨씬 이전부터였다. 5년 전만 해도, 아니 3년? 2년? 그때까지만 해도 차 한 대를 팔면 150 이상이 떨어졌다. 한 달 수입으로 천을 올린 적도 있었다. 굳이 통계를 보지 않아도, 길거리에서 신호대기에 걸려 주위를 둘러봐도, 수입차는 대세였다. 하지만 늘어나는 고객보다, 영업사원이 더 많았다. 그래도 나는 자신이 있었다. 내 고객 리스트만 해도 천 명이 넘었다. 그중에서 L은 최상급에 속하는 고객이었다. 그와는 따로 고급 바에서 만나 술을 마실 정도로 깊은 친분을 유지해왔다. 그가 연결해준 고객만 해도 수십 명이었다. 하지만 그를 탓할 마음은 없다. 어차피 비즈니스다. 계약을 어긴 건 나였다. 애초에 중고차에 손을 대는 게 아니었다. 회사를 믿는 게 아니었다. 김팀장이 손을 뗐을 때, 나도 털고 나와야 했다. 하지만 내게 정말 돈이 필요했다. P에게 사줘야 할 5백짜리 가방이 문제가 아니었다. 만일 내가 모든 사정을 다 말했다면, 아아, 그럴 수 있었다면, P도 나를 이해해줬을까? 우리가 봤던 집, 우리가 계약한 결혼식장, 그리고 예물들. 그 모든 걸 내가 이제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면, 그래도 그녀는 나와 결혼해주려 했을까?&amp;nbsp;&lt;/p&gt;
&lt;p&gt;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그날이 마지막이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나혼자 차를 몰고 돌아가던 길은 잘 기억났다. 그녀를 내려주고 그 방향으로 차를 몰다 첫 번째 신호등에서 유턴을 해야 했다. 나는 그 길을 수 백번 운전했다. 그런데도 그 마지막 길, 도로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떻게 그럴까? 나는 그날이 마지막인지 몰랐는데.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도로와 거리. 차도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유턴차선에 차를 세우고 정면을 바라봤을 때, 거리 양옆에 늘어선 전면이 모두 유리로 덮인 최신 빌딩의 높은 창에는 불빛이 많이 보였다. 나는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보며 신호가 바뀌기를 계속 기다렸다.&amp;nbsp;&lt;/p&gt;
&lt;p&gt;나는 기계적으로 차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센터페시아의 모니터를 터치하면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과 음향효과 같은 것들. 의식하지 않아도 입에서 줄줄 말이 흘러나왔다. 그 시선의 한 귀퉁이에 여자의 짧은 바지 아래로 드러난 눈처럼 하얀 허벅지가 걸려 있었다. 차의 주행감이나 성능에는 별 관심이 없던 여자가 관심을 보였다. 나는 직접 해보라고 했다. 뒷자리의 남자는 소음이나 실내크기에 대해 처음에 몇 마디 한 것 외에는 별말이 없다. 그러면서 계속 여자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여자는 곤란하다는 듯, 잘 모르겠다고 했다. 최근에 운전면허를 딴 것 갈았다. 여자는 예쁘다기보다는 귀염성있는 얼굴이었다. 키도 작은 편이었는데, 볼륨이 있었다. 나는 다시 가슴이 옥죄어오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P의 허벅지를 만지던 기억이 났다. 항상 운전할 때면 그랬다. 여자가 터치 모니터를 보려 몸을 기울이자 향수인지 화장품 냄새인지 좋은 냄새가 났다. 그녀의 허벅지, 가슴,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것 같은 통통한 볼, 매끄러운 피부. 그 모든 게 너무나 분명하게 내 눈에 보였다. 갑자기 그 존재감이 너무나 커져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뒷자리의 남자는 별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당연하다. 그에게는 그녀가 일상일 테니까.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 그리고 누리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3천5백짜리 차를 선물로 줄 수 있는 인생이란...&lt;/p&gt;
&lt;p&gt;나는 다시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 행복이란 말은 너무 흔해서, 이제 거의 아무 뜻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이제 나는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앞으로 얼마간, 아, 그게 언제까지일까, 내게 그런 감정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도대체 이제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나는 원래 낙관적인 인간이다. 걱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떤 일도, 걱정했던 만큼,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을 믿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고통은 없었다. 단지 마비될 뿐이었다. 마치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lt;/p&gt;
&lt;p&gt;시승코스의 반을 왔다. 이제 유턴을 해서 돌아가야 했다. 나머지 반은 고객이 직접 몰아 볼 수 있게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나는 이제 유턴을 해서 차를 세우고는 운전대를 뒷자리의 남자에게 넘길 것이다. 유턴차선에 차를 세우고 나는 신호를 기다렸다. 전방을 바라봤을 때, 반대편에서 오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옆에도 차가 없었다. 이게 뭐야? 나는 조금 웃음이 났다. 나는 마치 옆자리에 P가 앉아있는 것처럼 느꼈다.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공간. 여자가 핸들을 쥐고 있는 내 손을 잡아 자기 허벅지 쪽으로 끌어당겼다. 만져도 돼요. 여자가 말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3시 30분. 변하지 않았다. 이건 마치 백화점이나 도박장 같군. 여기서 나가면 또 다른 현실이 있을까? 만지고 싶지 않나요? 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허벅지를 만지고 있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손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시승일 뿐이다. 나는 이런 인생을 선택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신호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핸들을 꺾고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았다.&lt;/p&gt;
&lt;p&gt;&lt;span class=&quot;imageblock&quot; style=&quot;display: inline-block; width: 500px; text-align: center;; height: auto; max-width: 100%;&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45C7A33524032BC12&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45C7A33524032BC12&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451&quot; filename=&quot;UMG_cvrart_00602517324237_01_RGB300_800x721_107430173974.jpg&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앨범커버 : Nine Inch Nails [Year Zero (2007)]&lt;/p&gt;&lt;div&gt;&lt;br /&gt;&lt;/div&gt;&lt;p&gt;&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소설</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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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3 Sep 2013 21:23:5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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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돌아오지 않는 화살</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81</link>
      <description>&lt;p&gt;학생회관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9층까지 있었는데도 왜 엘리베이터가 없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단순히 아주 예전에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같은 시기에 지어진 대부분 건물은 이미 다른 최신식 건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 건물은 아직 남아있다. 7층에 총학생회 사무실이 있었다. 9층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7층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는 남들에 비해 불평이 적었다. 그는 타고난 강골이었다. 비록 몸집은 자그마하고 마른 편이었지만, 누구보다도 힘도 셌고, 체력도 좋았다. 그러나 그런 그도 1991년의 봄은 견디기 어려웠다. 무슨 일인가로 지하창고를 쓸 수 없어서, 시위용품들을 7층 복도에 두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것을 운반해야 했다. 특히 앰프를 옮기는 일은 지옥이었다. 그때도 그만이 한 번도 쉬지 않고, 1층에서 7층까지, 또 7층에서 1층까지 앰프를 지고 오르내렸다. 물론 그라고 그 일이 쉬웠겠느냐마는 그는 한 번 멈춰 서면 그만큼 더 힘들어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물러서면 안 된다고.&amp;nbsp;&lt;/p&gt;
&lt;p&gt;대학 1학년부터 그런 그의 타고난 힘과 체력, 그리고 성실성은 유명했다. 하지만 선배들은 그가 훌륭한 학생운동가는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학습능력이었다. 2학년이 되어서도 세미나를 진행하는 역할을 맡지 못했다. 물론 그를 좋아하는 선배나, 후배는 많았다. 그는 어쨌든 타고난 일꾼이었고, 누구에게도 아무 불평을 하지 않았다. 몸을 쓰는 일이라면 언제든 그가 가장 먼저 불려졌고, 그는 언제라도 준비되어 있었다. 무거운 것을 나르는 일뿐만 아니라, 그의 또 다른 장점은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었다. 무대장치를 조립하거나, 대형걸개를 걸거나 할 때, 그는 마치 원숭이처럼 두려움 없이 재빨리 꼭대기까지 올랐다. 아시바를 조립하는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어느 날, 그의 후배 중 하나가 자기 몸에 불을 붙인 채, 건물 3층 난간에서 뛰어내렸을 때도 그는 근처에서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그가 있던 곳도 거의 3층 높이였지만, 불길에 휩싸여 바닥에서 뒹구는 후배를 보았을 때,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내렸다. 그 일로 그는 한쪽 발목 인대가 끊어졌고, 여러 달 동안 깁스를 한 채 학생회관을 오르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 이십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신경 써서 걷지 않으면 쩔뚝이는 것처럼 보였다. 후배의 유서에는 여러 말이 적혀 있었지만, 그중에서 그가 인상깊게 읽었던 문구는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되어’였다. 이제와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때는 모든 게 너무나 분명했다. 그것은 전혀 어리석은 행동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숭고한 행위로 느껴졌다. 그는 아주 깊은 슬픔을 느꼈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한 기쁨도 느꼈다. 이제 곧 모든 것이 바뀌리라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남은 사람들의 열정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는 1991년이 지나고, 92년, 93년이 될 때까지도 학교에 남았다. 졸업을 연기하면서 5학, 6학까지 버텼다. 그러나 그 무언가는 항상 그의 앞에, 비록 아주 조금이었을 뿐이라도, 언제나 손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도, 학생회관에서였다. 그녀는 신입생이었다. 어느 날 술을 마시며 우르르 몰려다니다 마지막으로 건물로 돌아왔다. 문이 잠겼는데 아무도 열쇠가 없었다. 그는 복도 창문을 통해 난간을 넘어 사무실 창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난간과 난간 사이를 뛰어서 건너야 했다. 비록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7층 높이였다. 아내는 그런 그를 봤고, 거기에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용기 이상의 무언가. 다른 사람들은 그저 미친 짓이라고 여긴 그의 행동에서.&amp;nbsp;&lt;/p&gt;
&lt;p&gt;운동에서 손을 떼고 그가 제일 먼저 직업으로 삼은 일은 학습지 교사였다. 세미나도 진행하지 못했던 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1년은 버티라고 아내는 말했다. 그래야 퇴직금이라도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학습지 교사는 개인사업자였다. 퇴직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어리둥절했다. 그런 일들이 계속되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자식이 생기면서, 그의 힘과 체력, 타고난 성실성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그 가족을 지켜주지 못했다. 운이 좋았던 때도 있었다. 마지막에는 운이 나빴다. 그는 모은 돈을 탈탈 털고, 대출까지 껴서 목좋은 대리점을 인수했다. 권리금만 1억이 넘었다. 그건 사기라고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를 속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무언가가 그를 속였다. 지금은 의료장비업체의 영업직으로 일하고 있다. 매일 수 십군데의 개인병원, 특히 치과를 돌아다녀야 했다. 인대가 끊어졌던 발목이 말썽이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발과 발목이 퉁퉁 부어 올랐다. 그는 그 시절 자신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렸던 학생회관이 보이는 병원의 옥상을 발견했다. 그는 며칠 내내 일과의 마지막을 그곳에서 보냈다. 아내는 아이가 사립초등학교에 다니길 원했다. 1년에 등록금만 천만 원이 넘었다. 그 돈을 대기 위해서, 자신이 하루에 몇 군데의 치과를 돌아다녀야 하는지,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는 너무 짧았고, 몸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는 결국 멈춰야 했다. 멈춰서 쉬어야만 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에서 거의 자기 몸의 반 정도 되는 커다란 앰프를 등에 지고 7층까지 오르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그는 한 번도 쉬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지쳤다.&lt;/p&gt;
&lt;p&gt;그는 구두를 벗어 가지런히 바닥에 두었다. 퉁퉁 부은 발목 때문에 다시 신으려면 고생 꽤나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그는 잘 알 수 없었다. 내가 다시 신어야 할까? 왜 자신이 구두를 벗었는지 그는 몰랐다. 내가 지금 뭘 원하고 있는 거지? 그는 난간에 올랐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변은 샛노랗게 물들었다. 모든 게 너무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었고, 단 하루도 그날로부터 멀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혁명은 추억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진짜 노동자, 철의 노동자가 되길 원했다.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되어, 적의 심장을 향해서 쏘아지길 바랐다. 그에게는 항상 그런 용기가 있었다.&amp;nbsp;&lt;/p&gt;
&lt;p&gt;&lt;span class=&quot;imageblock&quot; style=&quot;display: inline-block; width: 480px; text-align: center;; height: auto; max-width: 100%;&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44C8F365240337F2E&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44C8F365240337F2E&quot; width=&quot;480&quot; height=&quot;480&quot; filename=&quot;UMG_cvrart_00602527017273_01_RGB300_480x480_10405795533.jpg&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소설</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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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9 Jul 2013 16:57:3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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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결혼의 이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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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gt;그녀는 자신이 남편과 결혼한 이유가, 그러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와 결혼한 이유가 엄마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친구들이 입을 모아 말했듯이 그는 결혼상대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그녀가 아예 결혼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어쩌면 평생 독신으로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에게도 그녀의 결혼보다 상대가 그라는 사실이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이전까지 전혀 연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 주위에는 남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딜 가나 눈에 띄는 미녀였고, 언제나 미소 짓는 얼굴에 활달한 성격이었다. 그녀는 명문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만에 때려치우고, 곧바로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회계사 시험을 준비해서 전공자보다도 더 짧은 시간 내에 자격증을 취득했다. 몇 년 경력을 쌓은 후에는, 실무능력은 말할 것도 없이, 누구와도 어울리는 친화력, 탁월한 리더쉽, 또 추진력 등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기존에 몇 배의 연봉을 제시하는 회사들이 줄을 섰다. 누구도 그런 완벽한 그녀의 배우자를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 그녀가 그와 만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그가 겉보기와 달리 무언가 대단한 것을 숨긴 남자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게 무엇인지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사실을 말하면 그녀도 처음에는 몰랐다. 그녀는 결코 속물적인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도 막연히 자신과 같은 전문직종에 근무하거나, 아니면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자기 일을 갖고 그 일에 자부심을 가진 남자가 자신의 미래의 남편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amp;nbsp;&lt;/p&gt;&lt;p&gt;그런데 왜? 그녀가 그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언제나 완벽히 그녀의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녀의 부탁이나 요구에 ‘노’라고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공주처럼 떠받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남자의 천성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회사에서 아무리 나쁜 일이 있었다 해도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금방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마치 온 세상이 다 자기편처럼 느껴졌다. 물론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는 그녀에 비해서뿐만 아니라, 그녀가 아는 대부분의 남자에 비해서도 거의 무능력자에 가까웠다. 실제로 그가 어떤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서른 중반에 이르른 그녀는 사람의 일이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자기 자신의 경우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주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던 일 중의 하나는 그녀의 언제나 밝은 모습 이면에 있는 상상키도 어려운 어두운 면이었다. 그녀는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똑 부러지는 여자였지만, 누구보다도 자유롭고 또 마음먹기만 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슈퍼우먼처럼 보였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이 자유롭다 느낀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자기 뜻대로 해본 적이 없다고 느꼈다.&amp;nbsp;&lt;/p&gt;&lt;p&gt;문제는 그녀의 엄마였다. 언제부터 엄마와 사이가 틀어졌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따져보면 최초의 조짐은 대학입시 때부터였는지도 몰랐다. 전공을 정하는 데 사소한 의견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전부터 주욱 그래 왔듯이 당시 그녀는 자연스럽게 엄마의 의견을 따랐다. 그러니까 의심이랄까, 괴로움이랄까 하는 감정이 생긴 건, 그보다 훨씬 후의 일이었지만, 그녀는 때때로 대학입시가 그 시작이라고 착각했다. 그녀는 소리쳤다. 그때도 그랬잖아. 엄마가 원한 전공으로 했잖아. 그러면 엄마는 그녀만큼 크게 소리쳤다. 그게 어떻게 내가 원한 일이야. 네가 원한 거지. 한번 균열이 발생하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모든 일에 두 사람은 충돌했다. 옷을 고르는 일부터, 어학연수, 취업, 회계사가 되는 일, 여자친구 등등. 엄마는 그녀가 하는 모든 결정에 영향력을 끼쳤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순간부터 하루도 집을 나가는 것에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충분히 그럴 능력을 갖춘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엄마와 아빠가 있는 집에 남았다. 그를 처음 집으로 데려가면서, 그녀는 당연히 엄마가 결혼을 반대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드시 내 뜻대로 하겠다, 엄마를 이기겠다 마음먹었다.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두 사람은 십 년 만에, 아니 과장되게 말하면 엄마와 딸로 관계를 맺고 나서 최초로 완벽한 의견일치를 이뤘다. 한판 싸움을 준비했던 그녀에게 맥 빠지는 일이었지만, 또 그렇게 돼서야 엄마를 이겼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어쨌든 그보다 기쁨의 감정이 더 컸다. 기뻐해야 할 일은 또 하나 있었다. 그 후에도 엄마는 사사건건 그녀의 결정에 태클을 걸었지만, 어쩐지 사위에게는 ‘노’를 하는 법이 없었다. 일은 간단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일이 있으면 남편에게 말하면 됐다. 남편은 그녀의 요구에 ‘노’를 하지 않았고, 엄마는 남편의 요구에 ‘노’를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요구에는 ‘노’가 없었다. 결혼식장을 정하는 일부터, 웨딩드레스나 신혼여행지, 신혼집, 그 모든 일이 그녀의 결정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그와 있으면 세상이 자기편처럼 느껴진 게, 단지 느낌에 불과한 것,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정말 자신이 슈퍼우먼이 되었다고 느꼈다.&lt;/p&gt;&lt;p&gt;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거기에는 슈퍼우먼과는 거리가 먼, 그리고 5년 전의 자기 자신과도 먼, 아니 자기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그렇게 되리라 상상도 못했던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미녀가 아니었고,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도 아니었다. 딱히 뭐가 이유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경력은 결혼 후 급속히 사양세로 접어들더니 완전히 박살이 났다. 이제 아무도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생겼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불같이 화를 냈다. 5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그녀가 서른 다섯 살이란 걸 믿지 못했는데, 5년이 지난 후에는 반대의 이유로 그녀가 마흔 살이란 걸 믿지 못했다. 그녀는 잘 웃지 않게 되었다. 어떤 것도 그녀를 즐겁게 만들지 못했다. 단 하나, 남편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녀는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결혼 후에 남편이 시작한 사업이 뜻밖에도 큰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 남편은 잘 봐줘 봤자 아르바이트에 불과한 일을 전전했었다. 남편의 성공에 가장 기뻐한 사람은 그녀보다 그녀의 엄마였다. 모르긴 몰라도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엄마의 남모를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죽이 잘 맞았다. 그녀와 보내는 시간보다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상관없었다. 어쨌든 남편은 그녀의 요구에 여전히 ‘노’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제 엄마와 밖에서 단둘이 만나 식사를 하지 말라고 해도 남편은 결코 ‘노’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남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내가 이제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는 걸까? 단지 그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모든 게 충족된 걸까? 그녀에게 든 진짜 무서운 생각은, 남편이 언젠가는 ‘노’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든 그런 순간이 올 거라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꼈다. 진짜 무서운 생각은, 바로 그 순간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더 이상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언제나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니까. 그녀는 그 말만큼 무서운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lt;/p&gt;&lt;p&gt;&lt;span class=&quot;imageblock&quot; style=&quot;display: inline-block; width: 412px; text-align: center;; height: auto; max-width: 100%;&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11C9E39524033C216&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11C9E39524033C216&quot; width=&quot;412&quot; height=&quot;413&quot; filename=&quot;그림10.jpg&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소설</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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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0 May 2013 23:38: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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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완벽한 대상</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83</link>
      <description>&lt;p&gt;그가 거의 매일 아침 운동하러 들르는 스포츠센터 옆에는 고등학교가 있다. 어느 맑은 여름 아침이었다. 그의 나이는 서른여섯이었고, 그렇게 서른다섯 번의 여름을 겪은 후였다. 또 여름 아침이라면 그보다 더 많이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새삼 다시 여름이고, 그 아침이 너무나 맑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히 짧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여고생들의 맨다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가끔 떠들듯이, 요즘에는 여고생들의 치마가, 그가 더 젊었던 시절, 고등학생 때나 대학생 때, 간혹 가다 보았던 눈이 휘둥그레 질만큼 야한 여자들의 치마만큼 짧았다. 그런데 이제는 가장 평범해 보이는 여고생들의 치마도 그만큼 짧았다. 물론 그런 풍경도 거의 일상적이었지만, 눈 부신 햇살과 더불어, 새삼스레 그의 가슴을 콩닥거리게 했다. 아니, 마치 그의 가슴을 옥죄어오는 것 같았다. 그는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슬픔 속에, 얼마 전에 헤어진 P의 존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P와 헤어진 일이 그의 삶에 무슨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그 당시, 그 일은 당연하리만큼 자연스러워서, 아무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슬픔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헤어졌다는 표현도 적당하지 않은 것처럼 그는 느꼈다. 솔직하게 말해서 P는 요즘 흔히 말하는 ‘섹스 파트너’에 지나지 않았다. P와는 꽤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왔다. 그가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부터니까, 거진 십 년이 되어가는 것 같다. 아,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가? 그동안 그는 그대로, 아마 그녀도 그녀대로 자기 내키는 대로 다른 사람을 만나 왔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섹스를 잘하고 좋아하는 여자가, 자기 하나로 만족할 리가 없다고 그는 내내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만남은 상당히 부정기적이어서, 짧게는 두어 달, 길게는 거진 일 년간 만나지도 연락하지도 않고 지낸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일 년이라 해도 일단 만나기만 하면 마치 어제 헤어졌다 만난 것처럼 친숙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몸을 섞은 것치고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고, 그게 이상하지도 않았다. 꼭 대화를 많이 나누고 서로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해서 친밀감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언젠가 그는 그녀에게 아직 교복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고, 다음번에는 가지고 나오라고 했다. 재밌겠는 걸, 어쩜 그런 생각도 다 했어? 교복 이후에는 뭐였더라? 두 사람은 동대문에 나가서 각종 유니폼, 무용복, 또 별스런 여러 의상을 구입했다. 그녀는 그다지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몸매 하나만은 정말 끝내줬다. 그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 상체를 일으켜 앉아 있는 그녀의 옆 모습을 마치 꿈속의 장면처럼 바라보던 걸 기억했다. 목과 어깨, 가슴, 그리고 허리로 이어지는 선이 정말 사진 속의 모델 같았다. 이상한 점은 그렇게 몸도 마음도 잘 맞고, 성격도 적어도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단 한 번의 의견 차이나 다툼도 없었던 그녀를 왜 자신이 정식으로 사귀지 않았냐는 것이었다.&lt;/p&gt;&lt;p&gt;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오빠는 결혼 안 해? 언젠가 P는 이렇게 물었다. 결혼?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두 살이었고 막 박사 학위를 딴 후였다. 그의 인생은 잘 나간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평탄한 편이었고 지금껏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그건 그의 성격이나 태도도 마찬가지여서, 그에게 있어 유별난 점이 딱 하나 있다면 바로 P였다. P야말로 그의 인생에서 단 하나의 일탈이었고 모험이었다. 그가 사귀었던 여자들도 마찬가지였고, 이제 결혼을 앞둔 그의 약혼녀도 그랬다. 약혼녀는 같은 학교에서 강의를 하다 알게 된, 그보다 네 살이 어린 여자 강사였다. 사귀고 나서야 그녀가 대단한 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변 친구들에게도 몇 번이나 말했듯이, 그는 처음부터 그 점 때문에 그녀를 만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혼까지 결심하게 된 데에는 그 점 때문이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방에 있는 대학 재단의 이사장이었다. 요즘에는 외국에서 학위를 따오지 않는 한, 교수직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자기 삶이 지금까지처럼 아무 어려움이 없길 바랐다. 물론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집 안이 그렇게 부자인 것치고는 전혀 되바라진 여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여서 자기 주장이 거의 없는 순종적인 여자였다. 그를 네 살 많은 남자가 아니라, 거의 마흔 살 많은 남자처럼 대했다. 한 번도 말다툼이 없었는데, 그 점에 있어서는 P와 같았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는 P와 전혀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 잘 안 맞는다는 것은 아니다. 무슨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그녀가 P와 전혀 다른 여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느낌은 그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켰나? 하지만 그 감정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은 그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lt;/p&gt;&lt;p&gt;어떻게 내가 P를 만났고, 또 P는 나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줬던 걸까? P가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이런 의문을 품었다. 그녀가 곁에 있을 때는 아무런 의문이 없었다는 것조차 의문이었다. 그리고 결혼을 앞두고 이제 두 사람이 그만 만나야 할 것 같다고 합의했을 때, 그 마지막 날에도 아무 의문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계절이 바뀌는 거와 같았다. 날씨가 추워져서 아, 이제 겨울이구나 싶다 해서, 여름이 지난 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 것과 같았다. 다시 계절이 돌면 여름이 올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야 그는 그녀가 계절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한 번도 돌아온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amp;nbsp;&lt;/p&gt;&lt;p&gt;그는 심지어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한 번도 직접적으로 들어온 적이 없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느꼈다. 혹시 내가 무슨 정신병에 걸려서 오랫동안 그런 존재를 상상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 기분이 들 때면 그녀의 흔적을 찾아 자기 방을 뒤지고는 했다. 이제 얼마 후면 결혼과 함께 떠나야 할 방. 교복이나 다른 별난 의상들은 찾지 못했지만, 마치 마를린 먼로의 그것처럼 순백의 미니 원피스를 찾아냈다. 그녀가 이 의상을 입고 마를린 먼로의 흉내를 내던 걸 기억했다. 그녀가 치마를 장난스레 펄럭이던 걸. 그리고 그녀의 쭉 뻗은 다리. 그 탐스럽고, 매끈하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그 완벽한 아름다움의 한 조각. 그는 밤마다 침대에 누워 가슴이 옥죄어오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여름 아침의 향기를 느꼈고, 자신의 인생에서 무언가 정말 중요한 것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감정은 그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자신이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인생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그를 뒤흔든 것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말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틀렸어. 그의 후회는 그런 깨달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밤마다 눈앞에서, 그것, 순백의 미니 원피스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완벽한 다리를 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천장을 뚫고 내려와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일어서면, 정말 원하기만 하면 저것을 가질 수 있었을까? 아니, 저러한 것이 정말 우리 인생에 존재할 수 있을까? 저렇게 완벽히, 마치 인생 전체를 버리고서라도 가지고 싶은 대상이? 하지만 그것은 그냥 그곳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고, 그도 영원히 몸을 일으킬 것 같지 않았다.&lt;/p&gt;&lt;p&gt;&lt;span class=&quot;imageblock&quot; style=&quot;display: inline-block; width: 500px; text-align: center;; height: auto; max-width: 100%;&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45C5B43524034300E&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45C5B43524034300E&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500&quot; filename=&quot;19.jpg&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소설</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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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2 Apr 2013 23:42: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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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공장지대</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84</link>
      <description>&lt;p&gt;그는 몇 년째 돈을 벌지 못했다. 생활은 부모님이 매달 부쳐주는 돈으로 꾸려갔다. 동생도, 가끔 건너 뛰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대체로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탰다. 그는 처음 얼마간, 한 반 년 정도는 그런 생활에 굴욕감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런 굴욕감도 자신이 극복해야 할 여러 문제 중 하나로 여기기로 했다.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고, 장사나 사업을 하기에는 주변머리가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을 두 번의 사업 실패 이후에 깨달았다. 그는 웬만하면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원했다. 동료나 거래처나 직원이나 심지어 손님이나, 누구도 만나지 않는 그런 사업이 있다면, 그게 바로 그가 원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뭔가 일을 해야 했지만, 그는 아직 자신에게 시간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다.&lt;/p&gt;
&lt;p&gt;최근에 그는 의류사업에 관심이 갔다. 몇 년 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자신의 옷조차도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올라가 살이 찌기 시작하면서, 또 어쩌면 사춘기를 겪으면서, 자신의 몸뚱이가 어떤 옷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느꼈다. 어떤 옷을 입어도 도무지 맵시가 나지 않았다. 그후로 옷에 관심을 끊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옷을 사는데 재미를 붙였다. 그는 진지하게 의류 쇼핑몰을 해볼까 생각했다. 심지어 패턴이나 재봉을 배워서 직접 옷을 제작하는 일까지 고려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원을 다녀야만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한지가 몇 달 전인데도 그는 단지 옷을 사기만 할 뿐이었다. 어쩐 일인지, 그 옷들이 썩 잘 어울렸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오늘 받아볼 옷 생각이 났고, 택배 상자를 개봉할 때마다 마음 깊이 행복감을 느꼈다. 그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거울이 무슨 마법을 부리는 걸까? 그가 사는 옷은 대부분 값산 보세 옷들이었다. 그리고 구입한 제품의 반 가까이를 한 번 입어보고나서 반품했다. 맘에 들지 않아서 그러기도 했지만, 때로 그렇게 반품하려고 구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거울에 한 번 비쳐보기 위해서. 그렇다 해도 결국에는 돈이 부족했다. 처음에는 단지 몇 십 만원이었다. 카드 서비스로 그 정도는 별 부담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먹는 거나, 다른 지출을 줄여서, 즉, 그 다음 달에 그렇게 해서 금방 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나 예상하듯이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몇 백 만원이 되었다.&amp;nbsp;&lt;/p&gt;
&lt;p&gt;그는 동생이 일하는 공장에 찾아갔다.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면서 공장지대에 도착했을 때는 집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도 넘어서였다. 그러고도 다시 마을 버스 같은, 공장지대 내를 운행하는 조그만 버스를 타고 30분을 더 들어갔다. 그는 문득 동생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떠올려봤다. 명절이나 부모님 생일 때는 반드시 부모님 집에 모여 식사를 했으므로, 금방 그 날짜를 추측해볼 수 있었는데(약 두 달전에 어머니 생일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날의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렇게 동생의 공장에 와보는 건 처음이라는 사실이었다. 전문대를 졸업하고나서 곧바로 취직했으니 벌써 십 년도 넘게 동생이 다니는 공장이었다.&lt;/p&gt;
&lt;p&gt;공장이름을 확인하고 들어가려는 데 수위실에서 붙잡았다. 그는 동생 이름을 댔다. 수위는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공장은 한 채 건물만 해도 엄청나게 커 보였는데, 그런 건물이 뒤쪽으로 몇 채 더 이어져 있었다.&lt;/p&gt;
&lt;p&gt;직원 휴게실은 식당도 겸하는 곳으로 역시 엄청나게 넓었다.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백 여개는 돼보였다. 작업 중이라 그런지 테이블에 앉아 있는 건 그 혼자 뿐이었다.&amp;nbsp;&lt;/p&gt;
&lt;p&gt;동생은 유니폼 점퍼를 입고 있었다. 처음보는 옷이었다. 바지는 사복인 것 같았는데, 보통의 정장 바지로, 그가 보기에는 바지단이 너무 넓었다. 동생은 직접 올 필요는 없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네가 일하는 곳도 보고 겸사겸사 온 거라고 말했는데,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금방 테이블에 사람들이 차기 시작했다. 모두가 동생과 같은 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만 다른 옷이었다. 말을 하는 건 대개 동생 쪽이었다. 그의 생활에 대해서 뭔가 묻지는 않았다. 그는 그런 동생의 배려를 느꼈다. 그것이 그를 오히려 초조하게 만들었다.&lt;/p&gt;
&lt;p&gt;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나눠피웠다. 어느새 주위는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사람들이 줄지어 건물 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다시 동생 쪽을 바라보았다. 문득 동생이 둘이 아주 어렸을 때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둘은 아파트 뒷편 한적한 도로에서 캐치볼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그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천 원짜리 지폐를 발견했다. 그가 돈을 주워 주머니에 챙겨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두 사람이 걸어왔다. 젊어보이는 남녀였다. 보자마자 그는 단박에 그들이 돈의 주인임을 알아챘다. 바닥을 살피면서 그들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꼬마야, 여기서 혹시 천 원짜리 못봤니? 여자쪽이 물었다. 남자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확신을 갖고 있었다.&amp;nbsp;&lt;/p&gt;
&lt;p&gt;“난 깜짝 놀랐어.” 동생이 말했다. “형이 못봤다고 했을 때 말이지. 난 당장 그 두 사람이 형의 주머니를 뒤질거라 생각했는데…… 안 그랬지.”&lt;/p&gt;
&lt;p&gt;그는 가만히 있었다.&lt;/p&gt;
&lt;p&gt;“왜 그랬을까?”&lt;/p&gt;
&lt;p&gt;“뭐가?”&lt;/p&gt;
&lt;p&gt;“그냥 왜 그랬는지 궁금해.”&lt;/p&gt;
&lt;p&gt;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속이 미쓱거렸다. 동생의 넓은 바지단이 눈에 들어왔다. 형편없는 옷이었다. 그는 동생이 좀 더 멋지게 옷을 입길 바랐다. 동생은 형을 바라봤다. 어쩐지 형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그러고보니 젊어진 느낌이다. 그러고보니 형은 아주 멋지게 보였다. 살도 많이 빠지고, 얼굴 피부도 좋아졌다. 옷도 아주 멋졌다. 마치 연예인 같다고 동생은 생각했다. 쫙 달라붙는 바지에, 조금 헐렁한 후드 야상을 입고 있었다. 동생은 형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었다. 공부도 나았고, 운동이나 예술적 재능이라 할만한 부분에서도 나았다. 동생은 자신이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느꼈다. 사실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그냥 성실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갈 뿐이었다. 그런 성실성을 누군가는 훌륭하게 여기겠지만 정작 스스로는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동생은 그때 형이 그들에게 천 원짜리를 못봤다고 했을 때 정말 놀랐다. 형은 그런 사람이었다.&lt;/p&gt;
&lt;p&gt;버스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안내판을 봤더니 배차간격이 한 시간 가량 되어서, 그는 걷기 시작했다. 가다가 버스가 오면 올라탈 생각이었다. 밤이 되었고,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도로에도 차가 거의 없었다. 마치 비가 내린 후처럼 가로등 불빛에 도로가 번들거렸는데, 아무리 기억해봐도 언제 비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공장지대는 계속 이어졌다.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건물들. 철망. 송전탑. 그리고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가로등이 반듯하게 줄을 맞춰 저편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는 문득 고독감을 느꼈다. 어쩐지 쌀쌀하게 느껴져서 후드를 뒤집어 썼다. 도로 한 가운데 이상하게 기차 레일 같은 쇠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그 가운데로 걸었다. 옛날 생각이 났다. 그때도 이렇게 혼자 걸었던 것 같다. 동생에게 받은 돈으로 카드 빚을 갚는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 돈으로 해야할 일은 옷을 사는 일이었다. 그는 그 생각만 했다. 얼마 전 노트북 화면으로 보았던 자켓 생각을 했다. 진짜 멋진 옷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는 매일 집에만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바닥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가 문제일까? 왜 나는 입고 나갈 데도 없는 옷들을 구입하는 걸까? 그들이 다가왔을 때, 그는 자신이 그 돈을 못봤다고 하리라는 걸 짐작조차 못했다. 그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랬다. 그는 그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려줄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문득 아직도 그들이 그 돈을 찾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지상을 헤메는 게 아닐까. 그는 괴로움을 느꼈다.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닌가. 그 바닥에 떨어진 천 원짜리를 봤을 때, 자신이 느꼈던 말 못할 행복감이 어디서 왔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고작해야 천 원짜리일 뿐인데. 그것으로 살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천 원어치 뿐인데. 그는 도저히 그 돈을 돌려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돈은 이제 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동생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lt;/p&gt;
&lt;p&gt;그는 멈춰섰고, 공장지대를 둘러봤다. 그가 본 옷은 정말 멋진 옷이었다. 단지 그게 자신한테 어울릴지가 의문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모든 게 그 천 원짜리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세상에 대해 생각했다. &amp;lt;끝.&amp;gt;&lt;/p&gt;
&lt;p&gt;&lt;span class=&quot;imageblock&quot; style=&quot;display: inline-block; width: 500px; text-align: center;; height: auto; max-width: 100%;&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106A73D5240345D1A&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106A73D5240345D1A&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500&quot; filename=&quot;kk.jpg&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소설</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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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0 Jan 2013 23:48: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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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80</link>
      <description>&lt;p&gt;&lt;/p&gt;&lt;p&gt;누군가 박근혜가 되어서 지난 유신시절처럼 되면 어떡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건 마치 문재인이 되어서 빨갱이 세상이 되면 어떡하느냐는 질문과 다르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럴 거라고, 내 생각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물론 백 퍼센트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이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문재인이 된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질까?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 가장 가까운 곳에서 쉽게 체감할 수 있을만큼 무언가 달라질까? 이런 생각을 비관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마음 깊은 곳의 얘기를 들어보면 실제로 나 자신이 그것을 바라고 있는지 어떤지조차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낙관적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마찬가지라는 냉소주의라기보다는,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때,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김대중 때 비정규직법이 통과되었고, 노무현 때는 한미 FTA가 체결되었다. 이런 일들이 나쁘다는게 아니다. 어쩌면 단지 누구도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lt;/p&gt;&lt;p&gt;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문재인이나 민주당은, 또는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좌파라기보다는, 중도우파, 그냥 리버럴에 가깝다. 그들이 정권을 잡는다한들, 바꿀 수 있는 건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설혹 그러려고 한다한들, 적어도 이 사회, 이 세계, 좁게는 대한민국에서, 또 넓게는 민주주의라는 체계 하에서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이것이 내 생각이다. 이것을 똑같이 대입하면 저들이 정권을 잡는다해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세계는 얼마나 끔찍할까? 글쎄, 어쩌면 그냥 보기 싫은 일들이나, 불쾌한 일들, 때로 분통 터지는 일들이 좀 더 많아질 뿐, 그냥저냥 또 사회는 돌아가고, 삶은 계속될 것이다.&amp;nbsp;&lt;/p&gt;&lt;p&gt;하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이런 나의 생각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이런 나의 생각이 이미, 저들의 승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거의 아무도 쓰지 않는 말이지만,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한 번도 승리해보지 못한 게 아닐까? 앞서 말한대로 실제로 좌파, 진보진영이 정권을 잡았을 때 거의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아무도 ‘진정한’ 변화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란 건 그렇게 더 똑똑해진다해서 벗어던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정의상 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선택이자, 강요된 선택이지만, 그렇다고 선택이 아닌 건 아니다. 우리는, 아니 나는 문재인을 찍었지만, 결국 박근혜를 선택한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상한 말이지만, 문재인을 선택했을 때, 우리는 이미 박근혜를 받아들인다는 선택도 한 셈이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불공평해보이는가? 아니면 비합리적이라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는 걸 모두가 안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표면에 있는 게 아니라, 깊은 곳에, 아마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박근혜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있다. 바로 이 세계를 사랑한다는 데, 그저 조금 더 나아지길 바란다는 데 있다. 아무도 죽지 않길 바라는 데에 있다.&lt;/p&gt;&lt;p&gt;졌다. 패배했다. 이런 말들에 대해, 나는 이전 글에서, 민주주의에서는 어울리지 않다고 말했다. 진짜 패배라는 말을 쓸 수 있을 때는, 민주주의 자체가 패배했을 때만, 즉, 우리가 민주주의를 버릴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르다. 나도 이제마음 깊이 패배감을 느낀다. 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아마 그들은, 그리고 나 자신도 그렇게 말함으로써, 이 일을, 저들의 선택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선택이기도 한, 이 결과를, 한낱 게임의 일부처럼 여기고자 하는 게 아닐까? 졌다는 건, 우리가 이길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또 어쩌면 다음 번에는 이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포함되어 있다. 또 어쩌면 졌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런 마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또 말한 건데, 진짜 무서운 것은 바로 그런 생각에 있다.&lt;/p&gt;&lt;p&gt;아니, 다르게 말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질 수 있다. 패배할 수 있고, 또 깨끗하게 그 패배에 승복할 수도 있다. 다음 기회를 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지지 않았고, 패배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들은 죽었다.&lt;/p&gt;&lt;p&gt;민주주의의 무서운 점은, 마치 우리 모두가 그 한 순간에, 표를 행사하는 그 투표의 순간에 일순간 평등해진다는 데에 있다. 모두가 한 표를 가지고 있다. 이게 왜 무서운가?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그 반대의 의미, 그러니까 무서울 것 없고, 가장 용감해질 수 있는 그런 순간이 아닌가? 가장 기적같은 순간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그것이 정말 무섭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누구도 어떤 죽음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모두가 커다란 악을, 공평하게 나눠가지는 것 같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똑같은 분량의 악을 나눠가졌음으로, 모두가 악을 행함에 평등해지고, 그럼으로써 누구도 선하지 않고, 누구도 벌 받지 않는다. 다만 죄만이 남을 뿐이다.&amp;nbsp;&lt;/p&gt;&lt;p&gt;마치 우리는 누구를 죽이기 위해 투표를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반대의 의미가 된다. 누구를 살리기 위해 투표를 하는 것이다. 누구를? 바로 우리 자신을? 아니, 그냥 살아있는 사람을 계속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 또 어쩌면 죽은 사람을 계속 죽어있게 하기 위해서.&lt;br /&gt;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사는, 그런 선택에, 투표를 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만일 그런 선택이 있다면, 우리는 투표를 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세계를 상상해 냈다면, 이미 우린 그런 세계에 살고 있을 것이다. 투표는 그렇게 죄를 나누는 데에 있다.&lt;/p&gt;&lt;p&gt;나는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쌍용차의 해고 노동자들, 해직 언론인들, 파업에 참가한 노조원들, 송전탑에 올라있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 최저시급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사람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 물론 이 사람들이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다. 또 죽었다는 표현으로, 어떤 감정적인 분노를 불러 일으키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앙갚음이나 복수의 뉘앙스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만한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죽음이야말로 너무나 흔하고 평범한 일이기 때문이다. 진짜로 그렇다. 너무 흔하고 평범해서 보이지조차 않는다. 너무나 당연해서,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을 이상하게 보는 눈이 있다면, 그런 죽음이 어떤 조그만 감정이라도 불러일으킨다면, 이 세상 전체가 그렇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떤 곳을 보아도, 죽음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이데올로기는 무언가를 감추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다. 그런 죽음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잘 보여서, 오히려 보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우리 눈에 덧 씌워져 있다. 우리 모두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 엊그제 우리는 그것을 나눠 받았다. 한 장씩 공평하게.&amp;nbsp;&lt;/p&gt;&lt;p&gt;물론 이런 생각도 지나친 비약이고, 지나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평범한 말들이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나는 졌다는 표현이 부당하다고 느낀다. 나는 여전히 죽었다는 표현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뭔가가 죽어야 한다고. 실제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그냥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뭔가가 완전히 ‘죽어야’ 한다고. 그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것을, 그 죽음을, 패배라는 것으로, 그런 마음으로 덮어버려서는 안된다고. 왜냐하면 그것이 진짜 패배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것은 ‘죽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말이 이해가 되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이미 죽어있는 것이, 다시 죽었다는 사실이다. 그때 우리가 받아들이는 죽음은, 패배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우리가 죽이는 것은, 어쩌면 바로 그 ‘죽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죽이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될까? 죽음을 반복하는 것이.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나는 모른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나 자신의 마음 깊숙이 그것을 바라는지조차 나는 알 수가 없다.&amp;nbsp;&lt;/p&gt;&lt;p&gt;다만 내가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든, 패배라고 하든, 죽음이라고 하든, 이번 선거에서 앞에 섰던 사람들,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방송인, 소셜테이너, 공개적인 지지자들, 단체&amp;nbsp;등등,&amp;nbsp;그들이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은 어떤 행위를 했고, 선택을 했고, 그렇게 해서 실패했다. 졌다. 패배했다. 그들의 이유가 겉보기와는 다른 것일 수도 있고, 탐탁치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지극히 사적인 것일 수도 있고, 단순히 어리석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서두에 내가 말했던 것과 달리,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어떤 일이란, 아주 나쁜 일이다. 서두의 그 지인이 묻고 걱정했던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왜 없겠는가? 지난 정권에서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래도 나는 그들이 후회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어쩌면 이것은 지나친 바람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 그것까지 바라서는 안되는지 모른다. 좋다. 이건 나의 욕심이라고 인정하겠다. 나는 그들 중 누구도 죽지 않길 바란다. 어떤 의미에서든 말이다.&amp;nbsp;&lt;/p&gt;&lt;p&gt;마지막으로 투표 결과가 확정되는 순간에 내 트윗에 올렸던 문장을 다시 쓰겠다.&amp;nbsp;&lt;/p&gt;&lt;p&gt;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 그냥 오는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에브리맨, 필립로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그들에게 깊은 감사를 느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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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1 Dec 2012 00:04: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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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그녀와 고양이</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85</link>
      <description>&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5;&quot;&gt;“봤어?”&lt;/span&gt;&lt;/p&gt;&lt;/span&gt;
&lt;p&gt;“뭘?”&lt;/p&gt;
&lt;p&gt;“고양이.” 그녀가 말했다.&amp;nbsp;&lt;/p&gt;
&lt;p&gt;“어디서?”&lt;/p&gt;
&lt;p&gt;“지금 막 우리 앞을 지나갔잖아.”&lt;/p&gt;
&lt;p&gt;“우리 앞?”&lt;/p&gt;
&lt;p&gt;“그래. 우리 앞을 막 지나서 저기, 저 골목 쪽으로 들어갔어.”&lt;/p&gt;
&lt;p&gt;“골목이라고?”&lt;/p&gt;
&lt;p&gt;그녀는 보도 오른편에 보이는 골목을 가리켰다. 골목은 마치 그녀가 가리킨 그 순간, 생겨난 것 같다. 그럴 리는 없겠지. 내가 딴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탓일 것이다. 나는 새삼 우리가 걷는 거리를 둘러보았다. 이상한 장소였다. 우리는 영업이 끝난 은행 앞에 차를 주차시키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저기다 주차시켜면 되겠네 하고 말했다. ATM기계가 놓인 무인점포는 형광등 불빛에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게 빛났다. 나는 마치 그것이 꿈속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내내 아무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는 예전에 이곳에 와봤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숱한 거리를 걸어 다녔으니까. 하지만 그렇다해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amp;nbsp;&lt;/p&gt;
&lt;p&gt;거리 대부분이 공사중이었다. 철조망에 둘러싸인, 운동장처럼 평탄하게 다져진 공터가 널따랗게 한 구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군데군데 그것보다 더 작은 공터도 남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빠진 이처럼 휑하니 드러났다. 바닥공사를 마친 곳은 매끈한 시멘트 블록 위로 철근 들이 묘비처럼 삐죽삐죽 솟아있었다. 남은 건물들도 모두 떠나버린 듯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도 가로수와 가로등만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우리는 마치 영화 세트장이거나 가치 있는 옛 건물들을 보존해놓은 커다란 박물관을 걷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멈춰 서서 한동안 골목을 바라봤다. 보도를 따라 늘어선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그녀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는 울창한 은행나무 가로수 그늘 속에 있다. 가끔씩 그 죽어버린 것 같은 거리에도 차가 들어와서, 반듯하게 구획된 이면 도로를 따라 무언가 찾는 것처럼 느린 속도로 이동하다가 마침내 그것을 찾아낸 듯 속도를 내서 반대편으로 빠져나갔다. 순간 나는 골목 입구에서 무언가 붕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천천히 하늘을 향해 올랐고, 가만히 바라보자 풍선 같았다.&lt;/p&gt;
&lt;p&gt;“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가 물었다.&lt;/p&gt;
&lt;p&gt;“고양이가?”&lt;/p&gt;
&lt;p&gt;“따라가야 할지도 몰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lt;/p&gt;
&lt;p&gt;“그건 토끼지.”&lt;/p&gt;
&lt;p&gt;하지만 그녀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사실처럼 느껴졌다. 토끼든, 고양이든. 실제로 그게 무엇이든.&lt;/p&gt;
&lt;p&gt;“못 봤구나.”&lt;/p&gt;
&lt;p&gt;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lt;/p&gt;
&lt;p&gt;“고양이가 아니었어?”&lt;/p&gt;
&lt;p&gt;나는 그렇게 말했다.&lt;/p&gt;
&lt;p&gt;“몰라. 고양이든, 아니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lt;/p&gt;
&lt;p&gt;“그래 중요하지 않지. 그게 우리 앞을, 여기서, 저쪽에서부터, 저쪽으로 지나갔다는 게 중요한 거야.”&lt;/p&gt;
&lt;p&gt;“따라갈 거야?”&lt;/p&gt;
&lt;p&gt;그녀는 여전히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서 있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다. 내가 사랑했던 얼굴. 한때.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얼굴. 나는 그녀가 원하는 만큼 그곳에 멈춰 서 있도록, 자신이 그곳에 서 있다는 것에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가만히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마치 나 자신이 그곳에 없는 것처럼 숨을 죽였다. 은행나무의 넓은 그림자 속에서.&amp;nbsp;&lt;/p&gt;
&lt;p&gt;“못 봤어. 그렇지. 못 봤지?”&lt;/p&gt;
&lt;p&gt;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lt;/p&gt;
&lt;p&gt;한순간 나는 그녀의 얼굴이 사라진 것처럼 느꼈다. 아니면 내가 사라졌거나. 시간이 흘렀다. 눈치채지도 못했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우리가 지금껏 걸어온 보도 쪽을 바라보고, 다시 앞에 놓인 보도를 봤다. 아마도 우리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것 같은 길을. 물론 그녀가 고양이를 찾으러 이 길을 벗어나지 않는다면.&lt;/p&gt;
&lt;p&gt;“나만 본 거야? 그런 건가?”&lt;/p&gt;
&lt;p&gt;“네가 본 건 고양이가 아닐지도 몰라.”&lt;/p&gt;
&lt;p&gt;“그건 아까 한 말이잖아.”&lt;/p&gt;
&lt;p&gt;“무언가……”&lt;/p&gt;
&lt;p&gt;“그럼 그게 뭐였을까?”&lt;/p&gt;
&lt;p&gt;“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지도 몰라.”&lt;/p&gt;
&lt;p&gt;“아무것도 아닌, 뭐?”&lt;/p&gt;
&lt;p&gt;“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잘못 봤다는 거지.”&lt;/p&gt;
&lt;p&gt;그녀는 내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를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찾아냈다.&lt;/p&gt;
&lt;p&gt;“사실은…… 아무것도 우리 앞을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lt;/p&gt;
&lt;p&gt;“아니, 어쩌면 내가 잘못 봤을지도 몰라. 내가 보지 못했을지도.”&lt;/p&gt;
&lt;p&gt;“하지만 우린 함께 걷고 있잖아. 앞을 보면서 걷는다고. 네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는 거야?”&lt;/p&gt;
&lt;p&gt;“그래. 우리 함께 걷고 있지. 같은 곳을 보면서.”&lt;/p&gt;
&lt;p&gt;“근데 어떻게 내가 본 것을 네가 못 볼 수 있지?”&lt;/p&gt;
&lt;p&gt;그럴 수 있다. 언제나. 반대로, 다른 곳을 보면서 서로 같은 것을 볼 수도 있다. 그녀가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나는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간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나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고양이 울음소리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있는 만큼 참는다. 그리고나서 천천히 설명을 시작한다.&lt;/p&gt;
&lt;p&gt;“네가 잘못 봤을 수도 있고,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어. 그건 고양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그리고 실제로 아무것도 우리 앞을 지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지. 하지만, 너 자신에 대해서 잘 생각해 봐. 넌 아까부터 계속 이렇게 굴고 있어.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자꾸만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고 있다고. 언제까지 너한테 거짓말할 수는 없어.”&lt;/p&gt;
&lt;p&gt;“내가 헛것을 본다는 거야? 내가 망상에 빠져 있다는 거야?”&lt;/p&gt;
&lt;p&gt;“그런 뜻은 아니야. 그렇다 해도, 그게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해. 실제로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그건 확실해.”&lt;/p&gt;
&lt;p&gt;“언제부터.”&lt;/p&gt;
&lt;p&gt;“어?”&lt;/p&gt;
&lt;p&gt;“언제부터, 내가 없는 것을 보기 시작했던 거야. 아니, 네가 그렇게 생각한 거야?”&lt;/p&gt;
&lt;p&gt;글쎄, 그게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부터.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말한다.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 내가 어떻게 더 참을 수 있겠는가? 애초에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게 처음부터, 애초부터 잘못되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서는 안 되었다.&amp;nbsp;&lt;/p&gt;
&lt;p&gt;내가 그녀의 몸에 손을 대려고 팔을 뻗는 순간, 그녀가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쳤다. 그녀는 나를 보고, 앞으로 뻗은 내 팔을 보았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amp;nbsp;&lt;/p&gt;
&lt;p&gt;“들려?”&lt;/p&gt;
&lt;p&gt;“뭐가?”&lt;/p&gt;
&lt;p&gt;“고양이 울음소리.”&lt;/p&gt;
&lt;p&gt;나는 진절머리가 났다. 팔을 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아까 자신이 가리킨 골목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미쳤어, 하고 나는 생각했다. 뭐가 들린단 말인가? 그녀는 점점 더 내게서 멀어져 갔다.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뭐라고 했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골목 안쪽으로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봤다. 그녀의 뒷모습. 한때. 내가……. 그만하자.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는다. 세운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고, 양팔을 되는 대로 바닥에 늘어뜨린다. 나는 조금 울었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곳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무언가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나는 손을 뻗었다. 고양이는 엉덩이를 바닥에 댄 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나를 봤다.&lt;/p&gt;
&lt;p&gt;“이리와.” 나는 손짓했다.&lt;/p&gt;
&lt;p&gt;고양이가 조그만 입을 벌려 무언가 소리를 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시 입을 다문다. 우리는 한참 동안 그렇게 바닥에 앉아 서로를 봤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마지막으로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것은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금세 내 손이 닿지 않는 쪽으로,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그녀가 가리켰던 골목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도 몇 발짝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몇 발짝 되지도 않는 거리였다. 나는 금세, 골목 입구에 선다. 빨간 풍선이 다시 날아올랐다.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쳐들고 까만 하늘 속으로 사라지는 풍선을 바라보다가, 다시 골목을 바라봤다. 고양이는, 그것은, 그 무언가는 이미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실제로 그곳에 없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본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녀를 본다. 그게 언제부터였지?&lt;/p&gt;
&lt;p&gt;&lt;span class=&quot;imageblock&quot; style=&quot;display: inline-block; width: 500px; text-align: center;; height: auto; max-width: 100%;&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40BD342524034AC09&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40BD342524034AC09&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563&quot; filename=&quot;오오츠카아이.jpg&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gt;&lt;/p&gt;&lt;div&gt;&lt;br /&gt;&lt;/div&gt;&lt;p&gt;&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소설</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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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0 Sep 2012 23:52: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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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전</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88</link>
      <description>&lt;p&gt;소년(일반적으로 고등학생 나이를 소년이라 할 수 없을는지 모르지만, 정신연령으로 따지면 더 쳐준 셈일 것이다.)은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고 느꼈다. 일반적으로 늦은 감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소년의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런 것처럼 그 사랑은 실패했다.&lt;/p&gt;&lt;p&gt;소년이 사랑에 빠진 대상은 인근 여고의 여학생이었다. 소년은 그녀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몰랐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예뻤다. 이것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누구라도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예쁜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소년은 사랑에 빠지지 못했을 것이다.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소년이 판단하기에 자신이 넘볼 만큼 예뻤다. 이것이 소년이 아는 것이었다. 저 정도 여자라면 나랑 사귀어줄지 몰라.&lt;/p&gt;&lt;p&gt;소년이 아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장수를 베려면 먼저 그 말을 공략하라. 그녀는 소년이 속한 서클과 교류하는 여고 서클의 부회장이었고, 당연히 서클에는 부회장 말고도 회장이 있었다. 소년은 그 회장 여자애에게 먼저 접근했다. 그리고 그러는 것이 훨씬 더 쉬웠다. 예쁜데다 어쩐지 새침하게 구는, 무엇보다 특별한 감정을 품은 여자에 비하면 어떤 여자라도 쉬웠겠지만, 회장 여자애는 특별히 더 그랬다고 할 수 있다. 일단 그녀는 예쁘지 않았다. 교정기를 끼고 얼굴에는 여드름이 가득했다. 뚱뚱하다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체격이 건장한 편이었다. 여성적인 매력이 거의 없었다. 몸집이 조그마하고 얼굴이 하얗고 깨끗했던 부회장에 비하면 더욱 그랬다. 단 한 가지 여성적 매력이 있는 부분이 있다면 목소리였다. 그녀와 통화를 하게 되었을 때 소년은 확실히 그것을 느꼈다. 이 애는 목소리가 정말 예쁘구나. 그 목소리 때문인지 소년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남의 얘기에 귀 기울여주는 배려가 있었고 재치도 있었다. 전화에서라면 그녀만큼 매력적인 여자는 없을 거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그래도 소년은 자신의 최종 목표를 잊지는 않았다. 아무리 말이 잘 통한다 해도 그녀는 말 그대로 ‘말(馬)’에 불과했다. 그녀와 그렇게 쉽게, 거의 어린 시절 친구처럼 친해졌으니 이제 부회장 여자애와 친해지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amp;nbsp;&lt;/p&gt;&lt;p&gt;하지만 일은 조금 미묘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서클에서 두 사람이 사귄다는 소문이 슬금슬금 돌았다. 전화로 그녀가 말했다. ‘너와 내가 사귄대.’ 그리고는 그 예쁜 목소리로 맑고 낭랑하게 웃음을 터뜨렸고, 소년도 덩달아 웃어버렸다. 그녀는 그런 소문에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소년은 오히려 부회장 여자애의 질투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무되기도 했다. 문제는 도저히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데에 있었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서클에서 회장 부회장이었을 뿐 사적으로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번호를 알고 있으니 전화를 하면 그만이었지만, 몇 번이나 망설이다 결국 누르게 되는 번호는 회장 여자애의 것이었다. 결국 소년이 택한 방법은 가장 소년다운 것이었다. 아니, 거의 유아다운 짓이었다고 볼 수 있다.&lt;/p&gt;&lt;p&gt;소년은 어느 저녁 할 말이 있다면서 거리에 있는 카페로 회장 여자애를 불러냈다. 그곳은 간단하지만 식사도 가능하고 후식으로 커피도 마실 수 있는 카페였다. 아주 고급스러운 데는 아니었지만, 고등학생에게는 상당히 격식을 차린 만남의 장소였다. 그날 그녀는 평소와 달리, 아마도 그 카페가 어떤 데인지 알고 있어서 그랬을 수 있지만, 꽤 멋을 낸 차림새였다. 립글로우즈인지 입술에도 뭔가를 발랐고, 머리도 공들여 세팅한 티가 났다. 그리고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소년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고, 어쩌면 그것은 그녀에게도 느껴졌으리라. 그녀는 소년이 자신만큼 긴장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그런 소년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애썼다. 네가 이제 뭘 하려 하든지 그 일은 아주 잘 될 거고, 나는 그런 너를 언제나 응원할게. 그녀는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확실히 효과가 있어서 소년은 금세 마음이 편해지고, 다시금 즐겁게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자신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하고 커피도 마셨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어색한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소년은 정말로 그녀와 함께라면, 아니 그녀가 도와준다면 무슨 일이든 자신이 해낼 수 있을 것처럼 느꼈다.&amp;nbsp;&lt;/p&gt;&lt;p&gt;마침내 소년은 용기를 내서 자신이 원래 계획했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회장 여자애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도저히 그녀 얼굴을 마주 보고 고백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편지봉투에 싸인 편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을 소년은 보지 못했다. 아니 보았다 해도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순간이라고 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 지난 후에 그녀는 언젠가 둘이 사귄다는 소문을 전했을 때처럼 맑고 낭랑하게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소년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그런 웃음은 아니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이 정도 부탁은 당연히 내가 들어줄 수 있으며 아마 편지를 받는 그녀도 아주 기뻐할 거라는 듯한 웃음이었다. 소년도 그녀를 따라 웃어버렸다.&lt;/p&gt;&lt;p&gt;하지만 두 사람이 카페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미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 생각에는 이제 우리 둘은 어떻게 될까 라는 의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예전처럼 나에게 연락을 할까? 내가 그녀에게 계속 연락을 해도 될까? 그런데 왜? 만일 부회장과 잘 된다면 그녀와 계속 연락할 이유가…… 그가 연락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이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되는 걸까?&amp;nbsp;&lt;/p&gt;&lt;p&gt;그때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팟하는 아주 작은 기계장치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정전이었다. 여기저기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그녀는 소년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정전은 두 사람이 걷던 작은 구역에서만 발생한 것이었다. 도시 전체가 암흑천지가 된 것도 아니었고, 도로 위 자동차 불빛도 충분하지는 않지만 거리를 밝혀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변을 촘촘히 메운 상점마다 촛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옷가게, 전자제품 대리점, 카페, 가구점. 통유리 너머로 촛불들이 마치 크리스마스 꼬마전구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소년은 그 순간 그곳이 동화 속 마을인 것처럼 느껴졌다. 동화책 삽화에 나오는 몇 백 년 전 유럽의 거리,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 속으로 점프한 것 같았다. 소년은 자기 팔을 붙들고 있는 그녀를 느꼈고, 갑자기 마음속 깊이 행복감이 차올랐다. 소년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지금 옆에 있는 여자가 자신이 오랫동안 동경했던 부회장 그녀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녀와 함께 이 거리를 걷는다면…… 저 촛불들이 마치 우리 만남을 축복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물론 현실은 그녀가 아니라 교정기를 끼고 여드름투성이인 다른 여자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행복감은 전혀 줄지 않았고, 아마도 그건 자기 마음이 간절히 그녀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그렇게 마음속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진다는 게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소년은 자기 팔을 꼭 불든 그녀의 손을 느끼며 계속 거리를 걸었다. 가슴이 계속 콩닥콩닥 뛰었다.&lt;/p&gt;&lt;p&gt;7년 후 소년은 자신의 예상이 정확히 맞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말로 소년은 그날 밤이 영원히 자기 머릿속에 박혔음을 깨달았다. 소년은(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지만, 편의상 계속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어느 날 밤, 거리를 걷다 다시 정전을 겪게 된다. 바로 그 이전에 소년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여자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누가 봐도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미인이었다. 키가 컸고, 옷차림이나 걸음걸이도 마치 모델처럼 세련됐다. 소년은 순간 저런 여자와 걷는다면 모두가 자신을 부러워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 같은 남자를 만나줄 리가 없지. 이런저런 공상에 소년은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정전이 되었다. 그날처럼 여기저기서 작은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그녀도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소년도 놀랐지만, 그 놀람만큼 빠르게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 또 정전인가? 소년은 첫사랑 여자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서라면 씁쓸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소년은 그 시절 자신이 너무나 어렸고 바보 멍청이였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어떻게 그런 여자에게……. 소년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정전인 거리를 계속 걸어갔다. 그날처럼 상점의 유리문 너머로 촛불이 은은하게 밝혀져도 소년은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amp;nbsp;&lt;/p&gt;&lt;p&gt;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우뚝 멈춰 섰는데, 갑자기 그 정전의 밤에 함께 있던 여자애가 첫사랑 여자가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맞아. 회장 여자애였지. 목소리가 정말 예뻤던. 그러자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소년은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어떻게 된 건가? 하지만 목소리는 현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보았던 모델 같은 여자였다. 그녀가 다시 소년의 이름을 대며 맞지 않느냐고 물었다. 소년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소년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다가, ‘우리 둘이 사귄대.’라고 말하고는 웃을 때처럼 예의 그 예쁜 목소리로 낭랑하고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맞구나.” 그녀가 말했다. 소년도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반가움에 소년의 팔을 붙들었고, 소년은 그런 그녀의 손을 내려다봤다. 가슴 깊이 행복감이 차올랐다. 소년은 그때 깨달았다. 소년은 정전인 거리를 둘러보고 다시금 촛불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소년은 고개를 쳐들고 높은 건물들에 둘러싸인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지상의 정전으로 그 별들은 더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원래 거기에 있었던 거지. 소년은 다시 그녀를 마주 보았다.&lt;/p&gt;&lt;p&gt;“네 생각을 하고 있었어.”&lt;/p&gt;&lt;p&gt;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amp;nbsp;&lt;/p&gt;&lt;p&gt;“운명 같지 않니. 또 정전이라니.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우리가 다시 만나다니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lt;span class=&quot;imageblock&quot; style=&quot;display: inline-block; width: 500px; font-size: 9pt; line-height: 1.5; text-align: center;; height: auto; max-width: 100%;&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2468145524034DA0B&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2468145524034DA0B&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504&quot; filename=&quot;34021_front.jpg&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5; text-align: center;&quot;/&gt;&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소설</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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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7 Jul 2012 00:05: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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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각주구검</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87</link>
      <description>&lt;p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5; 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lt;span class=&quot;imageblock&quot; style=&quot;display: inline-block; width: 500px;  height: auto; max-width: 100%;&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754A0405240350332&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754A0405240350332&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510&quot; filename=&quot;02176_front.jpg&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gt;&lt;/span&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배를 타고 가던 한 사람이 실수로 강물 속에 칼을 빠트렸다. 그러자 그는 즉시 뱃전에 무언가 표시를 한다. 다른 사람이 뭘 하는 거냐고 묻자, 그 사람은 너무 당연하다는듯이 내 칼을 빠트린 자리에 표시를 하는 거요, 나중에 도로 찾을 수 있게, 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어리석은 짓을 일컫는 말이다.&amp;nbsp;&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lt;br /&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하지만 그녀는 내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랬다. 그날, 아, 너무나 눈부셨던 날, 그녀는 내게 이 고사를 얘기해줬다. 각주구검. 칼을 찾기 위해 배에 표시를 하다. 그날 우리는 어느 유원지에서 2인용의 조그만 배를 타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노를 젓는 동안 내 맞은 편에 앉아, 배 밖으로 팔을 내밀어 마치 우리가 지나온 길을 표시하듯 강물 속에 손가락을 담그고 있었다. 배가 나아감에 따라 그녀 손가락이 마치 금을 긋듯이 표면 위에 긴 자국을 남기는 걸 나는 바라보았다. 초목은 푸르렀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바람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미약한 공기의 흐름이 부드럽게 맨살을 감쌌다. 아마 계절은 봄이거나 가을이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너무나 행복한 한 때였다.&amp;nbsp;&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lt;br /&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나는 그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야.” 그녀가 말했다.&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lt;br /&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누가?&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lt;br /&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칼을 물에 빠트리고 배에다 표시를 한 사람. 그렇지 않아? 누구도 강물 속에 빠트린 칼을 찾을 수는 없어. 배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물은 너무 깊으니까. 그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어. 하지만 그는 뭔가 해야한다고 느낀 거지. 진짜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야. 진짜 어리석은 사람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뭔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사람이야. 하지만 그렇게 배에다 표시한 사람은 결코 잊지 않아. 그렇게 자기 마음 속에, 금을 그어두는 사람은.”&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lt;br /&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금을 긋는다고?”&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lt;br /&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응.” 그녀는 강물 속에 담궜던 손을 끄집어 내어 자기 가슴에 대었다. 그리고는 마치 무언가를 새기듯이 손가락으로 가슴 한 가운데를 짧게 그었다. 그러자 나는 그녀 가슴에 그어진 숱한 금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잃어버릴 때마다 새긴 금들. 그녀는 가만히 그 자국들을, 아무리 채워도, 덧칠해도 손가락으로 천천히 더듬으면 이내 느낄 수 있는 그 틈들을 안타깝게, 슬프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황홀하게, 행복하게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amp;nbsp;&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lt;br /&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물새 한 마리가 건너편 숲 속에서 무언가에 놀란듯이 힘차게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 후드득 거리는 소리가 주변의 고요함을 기분좋게 깨트렸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노를 젓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배는 조금씩 어딘가로 흘러갔다. 나는 물새가 하늘 저편으로 한 점이 되어 영원히 사라진 후에야, 다시 노를 잡았고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정하기 위해 주변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부신 미소를 바라보았고, 내가 그때껏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또 앞으로 무엇을 잃어버려야 하는지 슬프게 깨달았다.&amp;nbsp;&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lt;br /&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시간은, 그래, 정말 강물처럼 흘렀고, 나는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와 왜 헤어졌는지, 누가 원해서 헤어졌는지, 그리고 그때의 내 심경이 어땠는지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나는 그 세세한 내용들을 다 기억할 수가 없다. 심지어 그녀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하다. 내가 그녀를 사랑했을까? 우리가 한 게 정말 사랑이었을까? 이런 유행가 가사 같은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때때로 그런 질문을 던져보기는 한다. 하지만 내 정확하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게 무엇이었든, 그녀와 만나고 헤어졌던 일은 내 인생에 그다지 큰 파문을 일으켰던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그녀와의 만남이 너무 짧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날 그녀가 말했던 대로, 누구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되찾을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손톱이든 뭐든, 날카로운 무언가를 이용해서 그것을 잃어버린 순간에 어딘가에 표시를 해두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그런 표시를 해둔 것일까? 나도 모르는 새에?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시간만큼 수많은 기억들 중에, 또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 순간에, 그녀와, 그녀의 얘기와, 그녀와 함께 했던 어떤 날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걸까?&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lt;br /&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인생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뒤돌아 생각하면 그 모든 일들이, 단지 하나의 일이, 다른 하나의 일과 구별될 뿐, 그 자체로서 의미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그것조차 의문스럽다. 어떤 일도, 다른 어떤 일과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인생의 모든 일들은, 원인과 결과로 촘촘하게 이어져 있을 뿐이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 모든 일이 하나의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런 생각과 말들에 대해 상당히 조심스러운 편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졌다. 이를테면 이제 나는 인생에 대해 말할 자격이 생긴 것 같다. 사랑은 중요하지만, 나는 그만큼 더 중요한 일들도 많다고 생각한다. 변명같지만 나는 그녀와 헤어진 일에 대해, 이런 관점을 비춰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은 빛났지만, 내 인생의 이야기속에서 그녀의 역할은 그 정도였다고 생각한다.&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lt;br /&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나는 품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점차 품위에 대해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뭐가 옳고 그른지, 예의나 염치가 무엇인지, 우리가 세상에 대해 어떤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나는 점차 마음을 쓰지 않게 되었다. 내게 중요한 건 품위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말해서 나는 그 임무를 훌룡히 수행했다고 믿는다. 여러 위기가 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결혼생활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고, 아이들도 훌륭하게 키워냈으며, 손녀 둘과, 손자 하나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바로 이 병실에 모여 있다. 이것이 그들 모두가 여전히 나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 모든 게 내가 품위를 지켜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amp;nbsp;&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lt;br /&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그런데 왜 하필 그녀일까?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아침에 나는, 의사가 내가 듣는 줄도 모르고, 내가 오늘 밤을 넘길 확률이 50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고 아내에게 말하는 걸 들었다. 나는 이제 산소호흡기를 떼도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내가 눈을 뜨고 있어도, 바이탈 기계에 똑똑하게 내 심장 박동이 그래프로 나타나고 있어도, 지금 병실에 있는 나의 가족들은 나를 거의 죽은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지금처럼 의식이 또렷한 적은 근 몇 달동안 처음인 것 같다. 아마 이것은 죽음이 내게 아주 가까이 있다는 걸 뜻하는 것이리라. 다른 무슨 뜻이 있을까? 인생에 어떤 이유가 있을까? 나는 마지막까지 품위를 지키고 싶다. 나는 어쩌면 이 마지막 순간을 위해, 그렇게 술한 유혹들을 견뎌냈던 것일까? 비겁과 굴종을 감수하고, 또 냉혹함과 잔인함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걸까? 나를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친구도 있다.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게는 가족이 있고, 그들이 내 마지막까지 곁에 있다는 사실이 내 인생을 증명해줄 것이다. 나의 품위를……. 그런데 왜, 그녀가 자기 가슴에 대고 그었던 그 짧은 금이 떠오른 걸까? 진짜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무언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사람이야. 그녀가 말했지. 나는 지금껏 뭘 잃어버렸던 걸까? 내 가슴에는 얼마나 많은 표식들이, 금들이 그어져 있는 걸까? 내가 그렇게 했을까? 나는 내 눈 속에 담긴, 가족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얼굴 하나 하나를, 내 가슴 속에 담기 위해 최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 그렇군. 이제 그들이 나를 잃어버리는 거야. 그들이 나를 잃어버리고 자기 가슴에 금을 그어야 할 때가 왔어.&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lt;br /&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 clear: none; float: none;&quot;&gt;나는 배를 타고 있다. 노를 젓지 않아도 배는 조금씩 어딘가로 흘러간다. 마치 그날처럼. 눈부신 그날처럼. 그러나 금방 나는 알게 된다. 내 가슴 속에 금들이 자라나고 있음을. 인생 전체가 그 모든 금과, 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니, 반대로 그 틈을 통해 흘러나와 강물이 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배를 타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금을 새길 수 있는 배도 없다. 온통 푸른 물뿐이다. 나는 이제 시간 그 자체인 것처럼, 흘러가는 물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인생은 그 금 자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다. 나는 그녀가 내 옆에서 함께 흘러가는 것을 본다. 그녀가 묻는다. 왜 여기에 있어? 나는 칼을 찾고 있다.&lt;/p&gt;</description>
      <category>소설</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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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3 Jun 2012 00:02:00 +0900</pubDate>
    </item>
    <item>
      <title>우체국 털이</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86</link>
      <description>&lt;span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5;&quot;&gt;&lt;p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none; float: none;&quot;&gt;&lt;span class=&quot;imageblock&quot; style=&quot;display: inline-block; width: 500px;  height: auto; max-width: 100%;&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67D5A3D5240352A27&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67D5A3D5240352A27&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500&quot; filename=&quot;018053_front.jpg&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gt;&lt;/span&gt;&lt;/p&gt;&lt;/span&gt;
&lt;p&gt;우리는 돈이 필요했다. 멀지 않은 도로에서 빗속을 달리는 자동차들의 타이어 소리가 머릿속을 울려대는 잡음처럼 들려왔다. 담배를 비벼끄고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노란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아래엔 빨간 바탕에 하얀 꽃무늬가 있는 플로어 스커트. 결코 고상한 색조합이라고 볼 수 없었다.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 차림이었다.&lt;/p&gt;
&lt;p&gt;“뭐든 해야겠어. 이렇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나에겐 시간이 많지 않단 말이야.”&lt;/p&gt;
&lt;p&gt;“뭘, 어떻게 할 건데.”&lt;/p&gt;
&lt;p&gt;“은행을 털자.”&lt;/p&gt;
&lt;p&gt;그녀는 나의 제안을 묵살했다. 나도 사실 그냥 해 본 소리에 불과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lt;/p&gt;
&lt;p&gt;“은행보다, 우체국을 털자.”&lt;/p&gt;
&lt;p&gt;그녀는 계속 말했다.&lt;/p&gt;
&lt;p&gt;“첫째 은행보다는 안전해, 게다가 돈도 있을 거야. 왜냐면 우체국에서도 은행업무 비슷한 것을 보기 때문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도 우리가 우체국을 털리란 것을 생각하지 못할 거란 말이야.”&lt;/p&gt;
&lt;p&gt;듣고 보니 나름대로 일리 있는 얘기다. 어쨌든 우린 만족할 만큼의 돈을 얻기만 하면 된다. 우체국이든 은행이든 빵가게든 마찬가지인 것이다.&amp;nbsp;&lt;/p&gt;
&lt;p&gt;그녀와 나는 벌써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방에 불을 켜고,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lt;/p&gt;
&lt;p&gt;우체국이 문을 닫을 즈음에 그녀와 내가 우체국 안에 들어간다. 그녀와 나는 스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셔터를 내린 다음 그녀가 총을 들고 사람들을 위협하고 내가 돈을 챙긴다. 돈은 우편배달가방에 쓸어 담은 다음 옆문으로 나온다. 유유히 거리를 걸어서 방으로 돌아온다.&amp;nbsp;&lt;/p&gt;
&lt;p&gt;우리는 서둘러야 했다. 우체국이 문을 닫을 시각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노란색 스웨터 위에 점퍼를 걸쳐입고 선글라스를 꼈다. 비 오는 저녁에 선글라스라.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amp;nbsp;&lt;/p&gt;
&lt;p&gt;비는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우리가 우체국에 도착하기까지 빗방울은 멀리서 달려와 곁을 스쳐가는 자동차 타이어 소리처럼 굵어졌다, 가늘어졌다를 반복했다. 경찰서 앞을 지날 때는 긴장이 되었다. 리볼버가 들어 있는 그녀의 점퍼 주머니가 너무 불룩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내일 소풍을 떠나는데 이 비가 그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정도의 걱정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amp;nbsp;&lt;/p&gt;
&lt;p&gt;우체국이 보이는 골목에서 우리는 담배를 나눠 피웠다. 비 때문에 눅눅해진 담배를 쥔 손끝이 추위 때문인지, 긴장한 탓인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lt;/p&gt;
&lt;p&gt;“들어갈까?”&lt;/p&gt;
&lt;p&gt;나는 고개를 끄덕였다.&lt;/p&gt;
&lt;p&gt;우산을 접으며 우체국 안으로 들어서자 내 머리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편지를 마지막으로 부친 때가 언제였지? 누구에게 보냈던 걸까?&lt;/p&gt;
&lt;p&gt;그녀가 나에게 눈짓을 했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내가 편지를 보낸 여자에게선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스키마스크를 뒤집어썼고, 나도 곧 따라 썼다.&lt;/p&gt;
&lt;p&gt;그녀가 총을 꺼내 들고 마치 등대처럼 우체국 안을 휘돌았다. 손님은 우리 둘뿐이다. 아무도 비가 오는 날엔 편지를 부치지 않는 모양이다.&lt;/p&gt;
&lt;p&gt;접수대 뒤편으로 여직원이 둘 있었고, 더 안쪽으로 나이가 들어 보이는, 흰색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남자 하나가 뭔가 샐러리맨적인 고민에 싸인 듯 머리를 감싸 안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접수대의 두 여자는 손을 들고, 그녀의 손에 들린 리볼버를 비현실적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손은 들고 있다.&lt;/p&gt;
&lt;p&gt;우체국 안의 책임자인듯한 남자도 여전히 고민에 싸인 표정을 지은 채 일어섰다. 나는 은행에 흔히 있는 비상벨 같은 것을 그들이 누르지 않을까 봐 신경을 썼지만 어쩐지 우체국 안에는 비상벨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긴 나도 우체국이 털렸다는 신문기사 같은 건 읽어본 적이 없다.&lt;/p&gt;
&lt;p&gt;“정면의 셔터를 내려.”&lt;/p&gt;
&lt;p&gt;그녀의 목소리가 동굴을 울리는 것처럼 턱턱하게 들렸다. 스키 마스크 때문이다.&lt;/p&gt;
&lt;p&gt;몇 초간 아무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스키 마스크 밑으로 얼굴에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남자는 고민을 끝내고 문쪽으로 걸어가 무슨 단추인가를 눌렀다. 그러자 셔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히고, 또 얼마간의 참을 수 없는 정적이 우체국 안을 가득 메웠다.&lt;/p&gt;
&lt;p&gt;이제 내가 행동할 차례다.&lt;/p&gt;
&lt;p&gt;남자를 끌고 접수대를 건너가 금고를 안내하라고 했다. 그동안 그녀는 접수대의 두 여자를 구석에 몰아넣고 등을 맞대어 앉힌 채 언제 챙겼는지 알 수 없는 전선을 정리할 때 쓰는 끈으로 그녀들의 양 손목을 묶고 있었다. 치밀한 여자다.&amp;nbsp;&lt;/p&gt;
&lt;p&gt;남자는 구석에 생각보다 조그마한 금고를 손으로 가리켰다. 너무 조그마했지만 단지 우체국에 금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만족했다.&lt;/p&gt;
&lt;p&gt;“열어.”&lt;/p&gt;
&lt;p&gt;남자는 쪼그려 앉아 손쉽게 금고의 문을 열었다. 손쉽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보통 영화에서는 열지 않겠다고 반항도 하고, 열쇠가 없다든지 비밀번호를 모른다든지 잡아떼기도 하다가, 어렵게 금고의 문을 열어주는 데 말이다. 남자를 뒤로 물러서게 하고, 금고 안을 들여다보자 의문은 쉽게 풀렸다. 금고 안엔 돈 대신 우편물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나는 당황했다.&lt;/p&gt;
&lt;p&gt;“뭐야, 이건?”&lt;/p&gt;
&lt;p&gt;“우편물입니다. 반송된 우편물은 여기에 이렇게 넣어둡니다.”&lt;/p&gt;
&lt;p&gt;“어째서 금고 안에 넣어두지?”&lt;/p&gt;
&lt;p&gt;“저도 잘 모릅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게 관례라서.”&lt;/p&gt;
&lt;p&gt;“돈은 없나?”&lt;/p&gt;
&lt;p&gt;남자는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그녀가 곁에 다가와 내게 말했다.&lt;/p&gt;
&lt;p&gt;“그거라도 챙겨.”&lt;/p&gt;
&lt;p&gt;어쩔 수 없다. 우편배달가방에 나는 금고 안의 반송된 우편물을 한통도 빠트리지 않고 집어넣었다. 그녀는 남자까지 익숙한 솜씨로 묶고서는 나가자고 했다. 나는 묶인 사람들이 혹시 화장실이라고 가고 싶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위안했다. 옆문으로 빠져나오면서 스키 마스크를 벗었다. 그녀는 다시 선글라스를 꼈고, 이번에는 나도 선글라스를 꼈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한 채 거리를 걸었다. 어둑어둑해진 거리의 공기가 시원했다.&lt;/p&gt;
&lt;p&gt;방으로 돌아와서도 그녀와 나는 별말이 없었다. 우체국에서 훔쳐온 편지들만이 바닥에 흐트러진 채 새 주인을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lt;/p&gt;
&lt;p&gt;“이제 어떡하지?”&lt;/p&gt;
&lt;p&gt;그녀는 내게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lt;/p&gt;
&lt;p&gt;“훔쳐온 편지를 읽는 거야.”&lt;/p&gt;
&lt;p&gt;그녀도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lt;/p&gt;
&lt;p&gt;““맥주나 사 가지고 올까?”&lt;/p&gt;
&lt;p&gt;우린 맥주를 마시며 밤을 새워 편지들을 읽었다. 맥주를 마시며 남의 편지를 읽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lt;/p&gt;
&lt;p&gt;&lt;br /&gt;&lt;/p&gt;
&lt;p&gt;*무라카미 하루키 ‘빵가게습격’ 오마주&lt;/p&gt;&lt;div&gt;&lt;br /&gt;&lt;/div&gt;&lt;p&gt;&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소설</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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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2 Apr 2012 23:58: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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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민주주의의 자살</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77</link>
      <description>&lt;p&gt;&lt;/p&gt;&lt;p&gt;선거가 끝난 후 각종 말들이 많다. 새누리당의 압승이니, 민주당이나 야권연대의 패배라느니. 또 MB심판이 아니라 무능력한 민주당에 대한 심판이라느니. 물론 이런 말들이나 수사, 관형적인 표현들에 딴죽을 걸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가만 따져보면 사실, 승리라느니, 패배라느니, 심판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어떤 잘못된 가정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민주주의의 본질적 의미에서, 투표를 통해 여러 가치나, 신념, 또는 인물들 중에 하나를 뽑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승리나 패배와는 거리가 있는게 아닐까? 그것은 아주 단순한게 말해서,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 아름다운 합의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을 아름답다 부르지 않을 재간은 없다. 그것은 분열에서 통일로 나아가는 거고, 그래서 투표를 민주주의 꽃이라 부르는 것이다. 물론 투표에서 졌다는 표현은 가능하다. 낙선한 후보, 소수가 된 정당, 또는 자신의 지지가 선택받지 못한, 다수가 되지 못한 어떤 유권자들. 그들이 졌다고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들의 패배감은 충분히 타당하다. 하지만 본질적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게임이 아니고, 스포츠도 아니며,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규칙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승리하는 게임이라고. 왜냐하면 언제나 다수가 원하는 선택이 이기기 때문이다. 다수가 원하는데도,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만 민주주의는 졌다고 말할 수 있다.&amp;nbsp;&lt;/p&gt;&lt;p&gt;새누리당이 이겼는가? 그렇지 않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본질적 의미에서 새누리당이나, 아니면 선거에서 이겼다고 말하는 그 누구라도, 그들은 단지 다수가 원하는 어떤 행위, 정책, 신념을 위임받았을 뿐이다. 기본적인 의미에서 그들은 일종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고, 진정한 승리자는 그들을 뽑은 유권자이며, 또한 그렇게 다수가 된 유권자들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인정하다면, 그들을 뽑지 않은 유권자 또한 승리자이다. 왜냐하면 결과가 비록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을지라도 다수의 선택에 어쨌거나 승복하겠다고 이미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패배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그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몰이해거나 반감에 기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그들은, 패배라고 말하는 자는, 그래서 이민을 가고 싶다고 말하는 자는, 말 그대로 이민을 가지 않고서는 진짜 패배할 수 없다. 그 패패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는, 단지 이 사회, 이 나라, 대한민국을 떠나는 것외에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이번 선거에서 승리자이고, 언제나 승리자일 것이다.&lt;/p&gt;&lt;p&gt;&amp;nbsp;이것이 민주주의다. 나는 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적어도 결코 유쾌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은 잘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앞서 열렬히 말했던 대로, 나 역시 이번 선거의 승리자일수밖에 없지만 결코 유쾌한 승리자는 아니라는 점도 밝히고 싶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단지 불유쾌한 승리자에 그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정확히 말해서, 단지 불유쾌한 정도가 아니라, 나는 아주 두려움에 빠진 승리자가 된 것만 같다. 나는 이제껏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 또 그 중에서 잘못된 의견을 가진 사람, 그런 선택에 대해 단순히 그들이 나보다 이기적이거나 멍청하거나, 말 그대로 아무 생각도 없는 돌대가리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쉽게 생각해왔다. (물론 내가 멍청하고 뭘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둘 중의 하나. 이기적이거나 멍청하거나. 이기심은, 민주주주에서 기본적인 소양이므로 문제될 게 없다. 다수의 이기심이 이기도록 하는게 민주주의니까. 멍청함은, 더 큰 문제일 수 있지만, 똑똑한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또한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선거 결과에서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에 대해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민주주의 그 자체를 버리려는 사람들 같다. 삼권분립이니, 언론의 자유니 하는 가치들을. 어떤 정책이나 신념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니 진보니, 또는 우파니 좌파니 하는 문제가 이니다. 또 그들이 더 이기적이고 사심에 가득차 있어서, 그들이 어떤 불의를 행하고, 정의롭지 못하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근본에서 흔든다. 적어도 그렇게 드러나고 있다. 상당히 의심할만한 근거가 있다. 나는 결코 그들을 선택한 다수들이, 단지 그들이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강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표를 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lt;/p&gt;&lt;p&gt;&amp;nbsp;내가 무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내가 무서운 것은, 이 결과가, 아무런 하자 없어, 어떤 부정이나 조작없이, 아주 민주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승리했다고 하고, 누군가는 패배했다고 한다. 내가 무서운 것은,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그 자체를 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내가 무서운 것은,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민주주의 그 자체를 두고 투표를 벌인다면, 이를테면 언론의 자유도 없고, 삼권분립도 없고, 의회 민주주의도 없고, 기타 등등, 더 나아가 이제 영원히 투표라는 행위자제도 없애버리겠다는 것을 두고, 투표를 벌인다면, 나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다수가 그렇게 하겠다고 선택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탈근대적인 해체가 아닌가? 시스템이 스스로 자살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만일 우리가 논문을 표절한 교수를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그러한 시스템 전체다. 왜 이것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다. 그 정도는 결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이제 민주주의가 민주적 방법에 의해, 살해되고 있는 걸 보고 있지 않은가?&lt;/p&gt;&lt;p&gt;&amp;nbsp;누군가는 승리했다고 하고, 누군가는 패배했다고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언제나 이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것이 스스로를 살해했을 때조차, 민주주의는 승리한 것이다. 나는 어쩌면 이것이 새로운 출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어떻게 스스로를 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적으로 자살할 수 있을까?&lt;/p&gt;&lt;p&gt;&lt;/p&gt;</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category>민주주의</category>
      <category>자살</category>
      <category>투표</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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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3 Apr 2012 04:51: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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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공정함에 대해서 - 너에게</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76</link>
      <description>&lt;p class=&quot;바탕글&quot;&gt;오래 전에 쓴 ‘떠나간 여자, RN-J, 낙서’라는 소설에서 나는 ‘떠나간 여자에 대해 누구도 공정하게 말할 수 없다.’고 썼다. 그러나 이제 그 말을 반대로 해야할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공정한 태도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떠나간 여자’일 거라고. 마치 진정으로 존경할 수 있는 위인은 항상 죽은 사람인 것처럼. 물론 문제의 핵심은, 떠나간 여자이든, 아니든, 아니, 그 누구에게도 우리는 완벽히 공정할 수 없다는 데 있지만, 이러한 결론은 너무나 손쉽고, 대개 아무 의미가 없다. 상황은 훨씬 미묘하고 복잡하다.&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며칠 전 술자리에서 이와 비슷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소설쓰기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문제점은 내가 소설을 쓰면서 공정하기를 바란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문제는 내가 한번도 그 공정함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지 못할 거라는 데에 있지 않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문제는 내가 그것을 바란다는 데에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내가 그럴 수 없는 걸 바란다는게 문제가 아니라, 그 공정함이 언제나 전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완벽한 공정함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이기심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나 자신이 얼마나 공정한지 보아라, 라는 식의 자기 현시적 태도, 잘난 척, 오만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무한한 이기심이란, 나는 어쨌든 그 모든 상황에 대해 아무 관련이 없다는 태도이다. 무한한 이기심이란, 때로 무한한 자기방기와 똑같다. 그것은 자기를 끊임없이, 상황에서, 이 세계에서 지워내려는 태도이다. 헤겔이라면 물론 이것을 ‘아름다운 영혼’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소설 뿐만 아니라, 어떠한 글쓰기에서도 가장 최악의 것이다. 심지어 철학에서도 그렇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경구를 떠올려보는 것도 좋다. 철학의 목적은 세계를 해석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데 있다.&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상황의 복잡성은 사실 이렇다. 내가 누군가에 대해 공정하려 애쓴다는 것의 의미는, 내가 그와 전혀 무관한 사람으로 순전히 그 사람을 나와 떨어진 객체로 바라보려는 데 있는데, 이것의 결과는 그럴 때, 나는 그 타인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보지못하는 것이다. 내가 소설쓰기를 통해, 타인이나, 또는 이 세계를 공정하게 그리려 애쓰면 애쓸수록, 나는 진짜 ‘부당함’에, ‘무지’에 빠지게 되는 셈이다. 진짜 ‘무의미’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그럼에도 역설적으로, 공정함에 대한 나의 욕망은 정말 떨쳐내기가 어렵다. 그것이 진짜 공정함이 아니고, 언제나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마치 나 자신이 진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 나 자신이 영원히 이 세계에서 이방인인 것처럼 느껴질 때, 내가 쥐고 있어야 할 마지막 것이, 마치 그 ‘공정함’인 것처럼. 생각해보면 그것은 가능한 일일지 모르겠다. 나는 언젠가 완벽히 공정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때에 진짜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리라. 거의 살아있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이것에 대한 절절한 묘사는 아마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하루키의 ‘한밤의 기적소리’라는 수필에 나와 있다. 그것을 이 자리에 모두 옮길 수는 없지만, 일부를 적자면 다음과 같다.&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그렇지만 그때 저 멀리에서 기적 소리가 들려. 그것은 정말로 정말로 먼 기적 소리야. 도대체 어디에 철도 선로 같은 것이 있는지 나도 몰라. …… 나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그리고 다시 한번 그 기적 소리를 듣지. 그리고 나서 내 심장은 아파하기를 멈춰. 시계 바늘은 움직이기 시작해. 철상자는 해면을 향해서 천천히 떠올라. 그것은 모두 그 작은 기적 소리 덕분이야. 들릴 듯 말 듯한 그렇게 작은 기적 소리 덕분 이라고. 나는 그 기적 소리만큼 너를 사랑해&quo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때로 나를 정말 불편하게 하는 것이, 그녀가 내게 공정함을 원할 때라는 게, 정말 이상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동시에 내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도 그녀에게 불공정하다는 것, 부당하다는 것이, 괴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코 간단하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는 너에게 결코 공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일 것이다. 너에게까지 내가 공정해진다면, 나는 정말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두꺼운 철상자에 갇혀’ 버리게 되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너를 부당하게 대하는 것, 사소한 내 이기심을 드러내는 것, 진짜 내 두려움을 드러내고, 나의 불편부당함을, 유치함을 드러내는 것, 아마도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진짜 특별함은, 그런 부당함 속에서만 드러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때에, 며칠 전 술자리에서 말했던 것처럼, 너를 통해서 나 자신을 볼 수 있으리라. 이것이 진짜 나의 이기심이다. &lt;/p&gt;</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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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radiofish.tistory.com/576#entry576comment</comments>
      <pubDate>Sat, 31 Dec 2011 12:43:22 +0900</pubDate>
    </item>
    <item>
      <title>입장에 대해서</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79</link>
      <description>&lt;p&gt;&lt;/p&gt;&lt;p&gt;누군가 곽노현 사태에 대해서, 만일 그가 보수였다면 어떻겠냐는 트윗을 올렸다. 그때도 우리는 그를 지지하겠느냐고? &amp;nbsp;요컨데 입장을 바꿔놓고 보라는 것인데, 이 말이 인문학을 공부한 소위 진보 지식인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마치 여성의 차별철폐를 위한 일련의 조치들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 아니냐는 논리와 흡사한데, 문제는 여성과 남성의 입장이 완전히 동등해질 수 있는 어떤 지점이 있어서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그 둘의 입장을 끊임없이 대조하고 때로 바꿔놓기도 하면서 정량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둘의 입장을 결코 바꿀 수 없다는 데 있다.&amp;nbsp;&lt;/p&gt;&lt;p&gt;만일 그렇게 입장이 쉽게 바뀔 수 있다면, 그건 '생각해 보자'고 할 필요도 없이 그냥 바꾸면 되고, 애초에 차별자체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므로, 우리 모두는 법적 의미에서 언제나 서로 입장을 바꿀 수 있는 개념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 얼마나 우스운 말인가? 만인이 평등하다니.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모두 절절하게 바라는 일이 아닌가? 개인이 처한 상황과 사회적 맥락들을 간단히 제거해버리고, 더불어 그런 개인들을 포함하는 사회구조나 체계의 문제를 덮어둔 채, 단순히 개인 대 개인의 문제로 치환해서 입장을 바꿔놓자는 것은, 언제나 그 사회에서 유리한 입장에 있는 지배체계의 뻔한 이데올로기가 아닌가?&lt;/p&gt;&lt;p&gt;아주 단순히, 만일 곽노현이 보수였다면, 아니 어떤 보수 교육감이 곽노현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있다면 그가 과연 곽노현과 똑같이 행동했을까? 만일 그렇다면, 처음에 저 진보 지식인이 얘기한 것처럼 그 상상 속의 보수 교육감이 곽노현과 똑같이 행동했다면, 당연히 그때도 우리는 그를 지지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 세계에서는 검찰과 언론이 진보의 편일 것이고, 차별받는 쪽은 남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입장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단 한번도 그런 세계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데.&amp;nbsp;&lt;/p&gt;&lt;p&gt;&lt;/p&gt;</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category>곽노현</category>
      <category>입장</category>
      <category>지식인</category>
      <category>진보</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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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1 Sep 2011 12:02: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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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나가수'가 획득한 예술적 성취</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78</link>
      <description>&lt;p&gt;&lt;/p&gt;&lt;p&gt;좋은 노래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예술적인 것은 좀 다르다. 사람들은 예술이 마치 필요한 것, 지켜야할 것, 어딘가 안전한 곳에서, 마치 신이 있는 곳 같은 데에, 보존돼 있어야할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예술도 신도 그런 곳에 있지 않다. 신과 무관하게 6일을 살고, 단 하루 신을 만나러 교회에 가는것처럼 우리는 예술을 만날수 없다. 그것은 마치 신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은 어떤 즐거움 위안 조화 평안의 모습이 아니라, 때때로, 아니 대개 폭력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아름다움이 숭고가 되는 지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한없이 불편하게 만들고, 두렵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있는 어떤 기계적인 부분과 닮았고, 또한 일견 조화롭게 보이는 세계의 한복판에 드러나있는 균열과 찢김의 자국과 같다. 그것은 마치 세계의 끝과 같지만, 그 끝은 처음과 연결되어 있다. 배꼽처럼. 예술은 그러한 불가능한 지점에 위치한다. 적어도 그곳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마치 상처를 치유받는 것처럼, 또한 그러기를 항상 기대하지만 예술은 상처 그 자체다. 물론 상처만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예술은 그렇게 언제나 세계 내에 포섭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예술은 자본주의적이며 신자유주의적이다. 만일 그러한 세계 밖의 어떤 고상하고 아름다운 예술을 주장한다면, 또한 그러한 것만이 진짜 예술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누구든 즉각적으로 그것이 예외를 통해 이 세계를 닫으려는 가장 고전적인 형태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그러한 닫힘의 허상을 보여주며 이 세계를 끊임없이 열려있게 한다. 아니, 열린 것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언제나 어떤 폭력적인 형태로. 닫힌 세계를 찢어냄으로.&lt;/p&gt;&lt;p&gt;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가수'가 어떤 예술적 성취를 획득한 장면은 바로 탈락자가 부활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프로그램이 완전히 실패하는 지점이고 서바이벌이라는 자신의 형식을 내적으로 부정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진정 예술적 의미에서 사람들을 한없이 불편하고 불유쾌하게 만들고, 열광케 만들었다. 그것은 어떤 비평가가 순진하게 언급한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대중예술'이 진정으로 신자유주의 내부에서 폭력의 형태로 만들어 낸 가장 순수한 예술적 퍼포먼스였다. 그것은 거기에 포섭되지 않았더라면 결국 획득할 수 없는 성취였다.&amp;nbsp;&lt;/p&gt;&lt;p&gt;물론 그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그 성취의 열매를 훌륭히 계승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모든 예술적 경험에 대해 그러한 것처럼, 불쾌해하며, 또는 두려워하며 물러났다.&lt;/p&gt;&lt;p&gt;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처럼, 사람들은 아주 흔하디 흔한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중 하나일 뿐인 것을 못박았다. 예수를 사이비 예언자라고 손가락질한 것처럼, '나가수'를 신자유주의적 천박한 시장자본주의에 고상한 대중예술과 가수들을 팔아넘겼다고 손가락질 했다. 그들은 신이 우리 안에 있는 걸, 신이 인간이 되는 어떤 예술적 순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술이 이 천박하고 폭력적인 세계의 한복판에, 그것도 바로 그 세계와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걸 견디지 못했다.&lt;/p&gt;&lt;p&gt;피디가 탈락자를 발표하는 순간, 그리고 이어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엉성하게 편집된 -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그들조차도 그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다 - 침묵과 놀람, 그리고 재도전과 부활의 장면들. 이 십 몇분의 편집본은 아마도 아주 오랜 후에 분명 신자유주의적 '예능이 획득한 가장 예술적인 장면'들로 기억될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그 장면에 등장한 출연자도 피디도, 방송관계자도 심지어 시청자들도 결코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는 그 끔찍한 장면을. 그것을 욕하고 비난하며 마치 성급히 문을 닫고 봉인하고 싶은 것처럼 그것에 관계된 숱한 의미들을 히스테릭적으로 생산하지만, 결코 다시 그 '바라봄-체험' 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amp;nbsp;&lt;/p&gt;&lt;p&gt;예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결코 다시 보고 싶지 않지만, 마치 기계처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어떤 장면이다. 우리가 그러한 예술적 경험을 단지 일요일 오후 여섯 시에 거실 소파에 편안히 앉아 뻔한 일요예능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었다는 건 정말 한 없는 행운일 것이다.&amp;nbsp;&lt;/p&gt;&lt;p&gt;&lt;/p&gt;</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category>나가수</category>
      <category>예능</category>
      <category>예술</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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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radiofish.tistory.com/578#entry578comment</comments>
      <pubDate>Fri, 25 Mar 2011 11:59: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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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물고기통신 205</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75</link>
      <description>&lt;p&gt;&lt;div&gt;미안하다는 말은 과거에 있지 않다. 그 의미의 대부분은 미래에 있다. 그것은 일종의 약속과 같아서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건 그걸 믿는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의 사과는 거짓말이 되기도 한다. 반대로 거짓사과가 진실이 되기도 한다. 그 진실은 내게 있지 않고 당신에게 있다.&lt;/div&gt;&lt;div&gt;27 Feb&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은 아무리 나쁜 법이라해도 법인 이상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소크라테스가 고작 그 정도의 도덕책같은 얘기를 할리는 없다.그 의미는 주어와 술어의 위치를 바꿔야 분명해진다.악법도 법인게 아니라, 법이 모두 악법이다.&lt;/div&gt;&lt;div&gt;6 Feb&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늙은' KBO도 있고 '늙은' 연제협도 있는데 '젊은'선수협과 '젊은'연예인협회는 어디에 있는가? '늙은'관료는 '늙은'로펌의 고문이 되었다가 다시 '늙은'관료가 되는데 '젊은'관료는 그저 늙기만 한다. 이것은 '젊은이'를 위한 나라가 아니다.&lt;/div&gt;&lt;div&gt;26 Jan&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물론 이것은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공정함을 위한 게임이다. 뭐가 공정한지 결정하기 위한 싸움이 어떻게 공정할 수 있겠는가? 공정함이 뭔지 모르는데 말이다.&lt;/div&gt;&lt;div&gt;26 Jan&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유혹을 끊는 단 한가지 방법은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영혼을 내줘야 한다. 적의 약점은 항상 그렇게 내부에 있다. 내가 그에게 내 자신을 내어줄 때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열된다. 내가 된다.&lt;/div&gt;&lt;div&gt;23 Jan&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quot;가장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이 가장 덜 고통 받고 있다&quot; &amp;lt;유령 주택 30만채… “은행 망하게 둬라”분노&amp;gt; http://bit.ly/b1fu4T&lt;/div&gt;&lt;div&gt;17 Nov&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군에 있을 때 행군 중에 고개를 만나면 머리를 숙이고 걸었다. 정상을 보고 걸으면 쉽게 퍼지기 때문이다. 항상 너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목표를 뚜렷히 하고 그것만 바라보는게 항상 좋은게 아니다.&lt;/div&gt;&lt;div&gt;13 Nov&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카톨릭교도들은 너무 어리석기 때문에 교황의 무류성을 믿고있다는 자유주의적 비판에 대한 답변 : 적어도 우리는 한명의 개인이 지닌 무류성을 믿는다. 민주주의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무류적이라는 훨씬 더 위험한 개념에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까다로운주체&lt;/div&gt;&lt;div&gt;11 Oc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사실 공산주의의 시대 전체는 정의로운 정치적 결정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존재했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 우리는 역사의 의미에 의해 추동되었다... 공산주의의 죽음은 역사의 영역에 나타나는 신의 두 번째 죽음이 된다. -시차적관점中&lt;/div&gt;&lt;div&gt;8 Oc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항상 말하는데 영화 어퓨굿맨에서 잭니콜슨의 명대사는 '너희는 진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만일 진실이 누구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면 쉽게 발견되고 전시돼 있는 거라면 그건 진실이 아니다.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lt;/div&gt;&lt;div&gt;8 Oc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의 편에 선 자뿐만 아니라, 상식-진실의 편에 선 자들에게도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을까? 그들이 모르는 건 자신들도 그저 편듦의 형식 속에 있다는 것, 맞은편 사람들도 상식-진실의 편에 서 있으며 어느 편이 진짜인지 중립적 판단을 내려줄 사람들이, 지금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에 있다는 것.&lt;/div&gt;&lt;div&gt;5 Oc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법과 정의가 일치하리라는 믿음 만큼이나 어리석은것은 없다. 왕따나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학생들이 왜 그걸 주변어른들에게 알리지 않는지 안타까울 때가 있는데 어떤 면에서 그들의 판단이 옳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게 아니라 모든 정의는 여하간 여기없는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법과 정의가 일치하리라는 믿음을 포기할수도 없다. 단순히 그것을 언젠가는 일치시키리라는 노력을 멈춰선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믿음이 없다면 법도 정의도 없기 때문.그 &amp;nbsp;불일치가 법의 가능조건이면서 정의의 가능조건이기 때문이다.&lt;/div&gt;&lt;div&gt;13 Sep&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영화 대부를 보면 이런 표현이 있다. 거부할수 없는 제안. 아시다시피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은 제안이 아니다. 그건 명령이다. 하지만 이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제안을 우리 자신의 선택으로 받아들여야한다. 여기에서 자유가 나온다.&lt;/div&gt;&lt;div&gt;27 Aug&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마른남자와 손잡고 걷고있는 뚱뚱한여자는 사랑스럽게 보인다.어쩐지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반면 저절로 눈이 가는 예쁜여자는 어떤남자와 있어도 그렇게보이지 않는다.그녀에게 사랑은 언제나 충분치 않은 어떤것처럼 보인다.편견일 뿐일테지만.&lt;/div&gt;&lt;div&gt;21 Aug&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언론이 계속 거짓을 말하면 사람들은 더이상 언론을 믿지 않을까. 양치기 소년처럼 진실을 말해도 듣지 않게 될까. 속았다는걸 깨닫는 순간은 이전에 거짓이었던 것이 진실이 되는 순간, 늑대가 우리를 잡아먹는 순간. 그때 우리의 믿음은 왜 틀렸을까? 하지만 믿음은 결코 틀리지 않는다. 믿음은 믿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 늑대가 나타났다는 것은 거기에 늑대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늑대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늑대에 잡아먹힌다. 믿지 않으면서 우린 그것을 믿는다. 이 믿음의 악순환을 끊고 늑대에게 잡아먹히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lt;/div&gt;&lt;div&gt;20 Aug&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물론 악플러들은 병리적 현상이다. 하지만 희생당하는 한 개인도 역시 병리적이다. 악플러들에서 가장 정상적인 사람, 오직 진실만을 추구하는 사람을 골라내고, 희생당하는 한 개인에서 정상적인 부분, 그 현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살과 뼈로 이루어진 진짜 사람을 골라내서 그 두 사람을 화해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불가능한데, 그 둘이 만나기 위해서는 역시 하나의 정상적인 세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lt;/div&gt;&lt;div&gt;17 Aug&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토이스토리3을 봤다.이것은 주인과 노예의 이야기다. 주인에게 버림받고 스스로 주인이 되려한 랏소가 마지막에 화물차 그릴에 십자가 형태로 매달린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우디는 단 한번도 주인에게 버림받지 않았다.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일까?)&lt;/div&gt;&lt;div&gt;주인을 부정한 랏소의 서니사이드는 지옥이었고 바로 이 세계였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주인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주인(그의 존재)을 믿기 때문이었다. 랏소는 주인의 '선함'을 의심했지만 주인 그 자체를 의심하는데까지 이르지못했다. 그래서 십자가에 매달렸다.&lt;/div&gt;&lt;div&gt;11 Aug&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도서관에 가면 책을 공짜로 볼 수 있다. 신간도 그렇다. 심지어 빌리는 것도 공짜다.백년 전부터 그랬다. 지식이란 이런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것은 굉장히 이상한 일이 되었다.&lt;/div&gt;&lt;div&gt;10 Aug&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것이 언제나 진실이었다. 영광따위는 바랄 수도 없지만 그렇게 목숨을 걸어야 한다. 당신이 목숨을 걸지 않으면 그들도 안다. 눈깜박할 사이에 알아차린다. -노인을위한 나라는없다. &lt;/div&gt;&lt;div&gt;5 Aug&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세계에는 이름이 없지. 언덕과 사막의 이름은 오직 지도상에만 존재해. 우리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이름을 붙이지. 하지만 우리는 이미 길을 잃었기 때문에 이름을 붙이는 거라네. 세계는 결코 잃을 수 없어. -국경을넘어 '코맥매카시'&lt;/div&gt;&lt;div&gt;18 Jul&lt;/div&gt;&lt;div&gt;&lt;br /&gt;&lt;/div&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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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 Mar 2011 00:40:4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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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타진요'와 의처증, 타블로는 그들에게 진실을 줄 수 없다.</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74</link>
      <description>&lt;p&gt;사람들은 흔히 의처증에 걸린 남자가 믿지 못하는 건 아내라고 생각한다. 물론 더 정확히 말하면 아내의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믿을 만한가 믿을 만하지 않은가 라는 문제가 여기에 먼저 개입된다. 즉, 어떤 제3자가 있어서 그가 보기에 남편의 불신은 타당하다고 옹호할 수도 있다. 물론 또 여기에 제4자가 있어서 이번에는 아내 편을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의처증과는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다. 즉 결국 아내가 외도를 했다는 게 사실로 드러난다 해도 남편이 의처증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왜 그런가? 남편이 맞았는데, 그는 진실을 알고 있었는데, 왜 의처증일까? 그것은 정당한 의심이 아니었는가? 문제는 남편이 믿지 못하는 게 아내가 아니라는 점이다. 거꾸로 이번에는 아내가 외도를 하지 않았다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백 명이면 백 명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증거가 드러났다해도, 남편 또한 지극히 이성적으로 자신을 틀렸음을 인정한다 해도, 그는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아내를 의심한다. 남편이 믿지 못하는 것은 아내나, 아내의 말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다. 다른 무엇? 그게 무언가? 반대로 의처증이 아닌 남편, 우습게도 누가 봐도 명백하게 외도를 하고 있는 아내를 믿는 남편이 있다면 그 믿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우리는 이런 안타까운 믿음들 또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바람둥이나 유부남의 뻔한 거짓말을 믿는 여자들. 물론 개별적인 사안마다 사연은 기구하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믿음이란 항상 다른 어떤 것을 믿는 것이란 사실이다.&lt;/p&gt;&lt;p&gt;&lt;/p&gt;&lt;p&gt;우리가 법정에 나갔을 때 우리는 판사라는 개인의 판단이 지닌 무결성을 믿는 게 아니다. 그가 법복을 입고 판사석에 앉아있을 때 그의 말과 판단에 대한 믿음은 판사 개인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 건 그의 옷과 자리에 체현되어 있는 상징적 권위이다. 우리는 우리 지갑 속에 있는 종이조각들이 천원이나 만원의 가치가 있다는 걸 어떻게 믿는가? 우리는 그것이 한낱 종이쪼가리, 몇 십원의 가치도 없는 종이장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다. 만일 그 종이가 그 자체로 천 원이나 만 원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것은 단순한 종이에 불과하니 다 찢어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도 있다. 이런 종이쪼가리 때문에 사람들이 울고 불고 하니 얼마나 꼴사나운가, 마치 세상 사람들이 돈을 신처럼 모신다며 비웃고 경멸한다. 이 사람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의처증 환자기 믿지 못하는 건 아내가 아니다. 그가 잃어버린 건 상징적 허구, 대타자에 대한 믿음이다. 그가 믿지 못하는 것은,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지금 자신과 살고 있는 한 여자가 아니라, 세상의 아내, 아내성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처증의 원인에 대한 아주 쉬운 추측이 남편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외도라든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하지만 이러한 추측은 말 그대로 너무나 쉽다.)&lt;/p&gt;&lt;p&gt;이렇듯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구체적인 어떤 대상이나 사실과 연결되지 않는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라는 말과 반대로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거기에는 항상 일종의 상징적 우회가 필요하다.&lt;/p&gt;&lt;p&gt;이러한 의미에서 ‘타진요’의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것은 타블로가 아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타블로라는 경험적 개인이 지닌 특수성, 또는 그 내용이 학력에 대한 불신이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 그 의심의 시발점은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마다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를 타블로 개인이나, 대한민국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학력이나 하는 쪽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너무나 순진하다. 또한 지극히 비정상적인, 우리와는 다른, 악플러들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쉽다. 이것은 물론 인터넷이라는 공간의 익명성에 대한 어떤 부정적인 태도를 함축한다. 그러나 개인 타블로에 대한 비뚤어진 증오나, 학력에 관련한 이상한 열등의식 때문이 아니라, 그 카페의 명칭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그들이 정말로 진지하고 절실히 '진실을 요구했다'고 보는게 왜 이상한 일이 될까? 그들이 보기에 문제는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은 거짓이 판을 친다고, 너무나 많은 진실들이 가리워지고 뭍혀지고 있다면, 그들의 그 절심함은 어느 지점에서 지나친 것, 병적인 것이 되는 것일까?&lt;/p&gt;&lt;p&gt;때로 어떤 사람들은 마치 어떤 객관적인 증거, 사실들에 근거해서 우리가 충분히 정당한 의심과 지나친 의심을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천안함 정부발표에 대한 의심은 타당한 것이고, 타블로에 대한 의심은 지나친 것이다. 또는 그 반대이거나. 하지만 우리는 또한 정말로 진실인 것이 뭍혀지는 경우를 숱하게 보아왔다. 처음에는 진실이었던 것이 거짓이 되거나, 거짓이었던 것이 진실이 되는 공식적인 역사를 보고 배웠다. 그때마다 우리의 믿음은 마치 도박을 하듯이 한 번은 틀리고 한 번은 맞고 그래야 하는 걸까? 그래서 나중에 그 승률을 따져 건전하고 상식적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걸까? 그러나 여기에는 정보의 접근에 대한 불평등성도 존재한다는 점을 끼워넣어야 할 것이다. 또한 사안마다 다른 개인적 관심과 열의라는 변수도 끼어든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사건의) 진실들을 열렬히 추구하기에는 개인의 능력은 한정되고 시간도 없다는 것이다.&lt;/p&gt;&lt;p&gt;문제는 분명히 현재 이 시대가, 또는 이 대한민국 사회가 너무나 많은 의심들로 뒤덮여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이 시대에 특별히 너무나 많은 거짓들이 횡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역시 순진하다. 갑자기 어느날부터 아내가 의심스런 행동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아내의 모든 행동이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왜 갑자기 사람들이 믿음을 잃었는가? 왜 그들은 그렇게 병적인 의심에 빠져들었는가?&lt;/p&gt;&lt;p&gt;하지만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믿는 것, 상징적 허구가 가지는 권위를 믿는 것 또한 병적(증상적)이라는 점이다. 백번 양보해서 건강한 믿음(의심)과 병적인 믿음(의심)을 가르는 구분선은 너무나 희미해서, 심지어 그 구분선이 존재한다는 믿음까지도 의심해야할 지경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시대는 믿음보다는 의심이 더 권장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는가? 이 의심의 역사는 물론 데카르트적 의심에서부터 비롯된다. 모든 확실성, 객관성, 권위에 대한 의심. 이것이 근대의 출발이지 않는가? 정확히 말해서 아버지의 권위(오이디푸스)를 거부하는 후오이디푸스적 상황이, 갑자기 증가한 의심과 무관하지 않다는 건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금지, 상징적 질서에 대한 근대의 반성적 거리는 물론 상징적 권위의 약화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아니, 심지어 탈권위화는 적극적으로 &amp;nbsp;권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는 자식과 친구가 되어야 하고 학생들은 선생의 수업이나 강의를 평가하고 점수를 매긴다. 사회적 관계에 있어 대등하고 수평적인 관계가 무엇보다 가치있는 것이 된다.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대개 가부장적이거나 심지어 독재적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이는 두 가지 주체적 양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냉소적인 주체와 다른 하나는 도착적 주체다. 냉소적 주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타블로가 스탠포드를 나왔는지 나오지 않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혹 스탠포드를 나오지 않았다해도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나온 것이다. 진실은 어차피 자의적인 것이니까. 도착적 주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타블로가 스탠포드를 나오지 않았다는 걸 안다. 그 진실을 밝히는 게 나의 임무다. 그들은 오히려 의심하지 않고 믿는 주체다. 도착적 주체는 타자의 진실을 안다고 믿는 주체다.&lt;/p&gt;&lt;p&gt;‘타진요’에 문제가 있는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다른 누구들보다 더 의심병에 빠져 있거나, 악의적이거나, 병적이라는 데 있지 않다. 물론 그들이 행한 것의 결과가 한 개인에 대한 무자비한 마녀사냥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 멈춰야 하는가? 이 사회의 진실(정의)과 한 개인의 인권이라는 문제는 어떤 지점에서 적절한 화해를 이룰 수 있을까? 그러나 무엇보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의 의심이 타블로라는 개인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면, 즉 그들이 잃어버린 것이 이 사회가 마땅히 지니고 있어야 할 진실에 대한 믿음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단순히 이 사회가, 누군가 말했듯이 투명하고 공정해진다면 그들 모두가 평화롭게 일상적 삶으로 돌아가게 될까? 아니면 반대로 법과 질서에 대한 무조건적인 권위로, 전근대적이라 할만한 강력하고 권위적인 국가체계로 돌아간다면 오히려 우리는 더 편해지게 될까? 정의로운 언론이나 지식인 집단, 수많은 위원회들, 이제는 유행어가 되어버린 집단지성, 시민사회의 합리적 공적 담론같은 새롭지만 따져보면 낡은 권위적 형상들을 다시금 불러와야 할까? 하지만 그 다양한 권위의 집합체들 중 어느 것을 '믿을 것'인가는 다시금 주체의 문제가 된다. 그렇담 (상징적 우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절대적인 이성적 능력(직관적 지성)을 획득하는 것만이, 그러한 주체가 되도록 스스로를 끊임없이 연마하는 것만이 최종적 결론이 될까? 물론 어떤 것도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고, 심지어 가능하지도 않다. 마치 타블로가 더 많은 증거를 제시하고 그에 대한 수많은 공중의 증명을 받는다 해서, 또 그들을 공적인 법과, 이번에는 거꾸로 그들에 대한 일반대중의 마녀사냥으로 단죄하고 낙인찍는다 해서 문제가 해결될 리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lt;/p&gt;&lt;p&gt;사태는 훨씬 더 근본적인 층위에 있다. 분명한 건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언론이나 젠체하기 좋아하는 냉소주의자들이 말하는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층위에서, 전혀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자유주의적 후기 자본주의적 상황, (탈)근대적 반성적 주체성의 양태와 무관하지 않다.&lt;/p&gt;&lt;p&gt;‘타진요’는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의 줄인말이다. 이것은 그 카페의 이름이다. 나는 그들이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들, 또는 요구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전부 다는 아닐지 몰라도 말이다. 다만 그들이 요구하는 진실을 결코 타블로는 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사태는 여전히 전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MBC도 대한민국 검찰도, 심지어 미국 FBI도 줄 수 없다. 그들 자신도 스스로에게 그것을 줄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진실이 저기 저 바깥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한 가운데,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오히려 보지 못하고, 심지어 보았다 해도 외면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이 요구해야 할 진실이기도 하다.&lt;/p&gt;&lt;p&gt;그러나 언젠가 우리가 그것을 얻었을 때, 그것과 대면했을 때 그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lt;/p&gt;&lt;div&gt;&lt;br /&gt;&lt;/div&gt;&lt;p&gt;&lt;/p&gt;</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category>권위</category>
      <category>냉소주의자</category>
      <category>상징적 우회</category>
      <category>오이디푸스</category>
      <category>의처증</category>
      <category>타진요</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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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9 Oct 2010 11:50:5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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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유일한 없음</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73</link>
      <description>&lt;p&gt;&lt;/p&gt;&lt;p&gt;그것외에 없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 자신과 구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쌍으로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대체될 수 있고 카운트 될 수 있다.&lt;/p&gt;&lt;p&gt;생각해보자. 세상에 정말 유일한 게 있는가? 어떤 것으로도 결코 대체될수 없는 하나의 것. 그것은 그자신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그것은 현상을 넘어선 어떤 것이 아니면 안된다. 나는 그러한 것을 단 두개만 생각해낼 수 있는데, &amp;nbsp;그것은 신과 나 자신이다. 이 두가지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것이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자신이다. 그렇다면 이 두가지가 실제로 존재하는가?&lt;/p&gt;&lt;p&gt;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신과 인간이 서로 대체될 수 있는 것, 이 역시 유일한 것이 아닌 그저 그런 보통의 사물이나 개념의 쌍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lt;/p&gt;&lt;p&gt;결론은 이렇다. 무신론은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신이 우리자신과 구분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믿는것이다. 이것은 결코 둘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가 될 수도 없다. 그것은 각자 하나이지만, 그 하나는 불충분하다.&lt;/p&gt;&lt;p&gt;자신을 믿는다는 말은 반은 맞는 말이다.나머지 반은 신으로서의 자신을 믿는다는 것인데, 이것의 의미는 우리가 신이라는 것이 아니라, 신이 우리라는 것이다.그러므로 신은 죽었다.신은 바로 우리 자신들에 의해 오염되었고 불충분해졌다.그것은 그자신으로서 충분하지 않다.하지만 그것은 유일하다.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유일한' '없음'이다.&lt;/p&gt;&lt;div&gt;&lt;br /&gt;&lt;/div&gt;&lt;p&gt;&lt;/p&gt;</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category>둘</category>
      <category>신</category>
      <category>하나</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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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5 Aug 2010 15:47:0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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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물고기통신 204</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71</link>
      <description>&lt;p&gt;최근&amp;nbsp;검찰의&amp;nbsp;행태를&amp;nbsp;보면&amp;nbsp;어떤&amp;nbsp;장면이&amp;nbsp;생각난다.&amp;nbsp;그&amp;nbsp;장면에선&amp;nbsp;무언가&amp;nbsp;알&amp;nbsp;수&amp;nbsp;없고&amp;nbsp;커다란&amp;nbsp;존재가&amp;nbsp;'보아라,&amp;nbsp;내가&amp;nbsp;얼마나&amp;nbsp;힘이&amp;nbsp;세고&amp;nbsp;무서운지'&amp;nbsp;큰소리&amp;nbsp;치고&amp;nbsp;있다.&amp;nbsp;물론&amp;nbsp;이것은&amp;nbsp;우리가&amp;nbsp;옛날이야기나&amp;nbsp;동화&amp;nbsp;등에서&amp;nbsp;익히&amp;nbsp;봐왔던&amp;nbsp;장면인데,&amp;nbsp;대개&amp;nbsp;이야기의&amp;nbsp;결말은&amp;nbsp;결국&amp;nbsp;그&amp;nbsp;존재가&amp;nbsp;자신의&amp;nbsp;무능을&amp;nbsp;드러내는&amp;nbsp;걸로&amp;nbsp;끝이&amp;nbsp;난다.&amp;nbsp;하지만&amp;nbsp;나는&amp;nbsp;이&amp;nbsp;나라에서&amp;nbsp;지금&amp;nbsp;벌어지는&amp;nbsp;일들이&amp;nbsp;어떻게&amp;nbsp;끝날지&amp;nbsp;알지&amp;nbsp;못한다.&amp;nbsp;그래서&amp;nbsp;때때로&amp;nbsp;정말&amp;nbsp;무섭다.&lt;br /&gt;about&amp;nbsp;11&amp;nbsp;hours&amp;nbsp;ago&amp;nbsp;via&amp;nbsp;Chromed&amp;nbsp;Bird&lt;br /&gt;&lt;br /&gt;내게&amp;nbsp;가장&amp;nbsp;놀라운&amp;nbsp;것은,&amp;nbsp;정말로&amp;nbsp;군이&amp;nbsp;무언가를&amp;nbsp;은폐하고&amp;nbsp;있다면,&amp;nbsp;어떻게&amp;nbsp;그들이&amp;nbsp;그것이&amp;nbsp;성공할&amp;nbsp;거라고,&amp;nbsp;은폐할&amp;nbsp;수&amp;nbsp;있을&amp;nbsp;거라고&amp;nbsp;여겼는가&amp;nbsp;이다.&amp;nbsp;이것은&amp;nbsp;이제껏&amp;nbsp;많은&amp;nbsp;성공이&amp;nbsp;뒷받침되지&amp;nbsp;않고는&amp;nbsp;취할&amp;nbsp;수&amp;nbsp;없는&amp;nbsp;선택이&amp;nbsp;아닌가?&lt;br /&gt;하지만&amp;nbsp;다시&amp;nbsp;한번&amp;nbsp;그것이&amp;nbsp;성공한다면&amp;nbsp;나는&amp;nbsp;놀라지&amp;nbsp;못할&amp;nbsp;것이다.&amp;nbsp;정말&amp;nbsp;그렇다.&amp;nbsp;나는&amp;nbsp;무슨&amp;nbsp;일이&amp;nbsp;일어났는지&amp;nbsp;결코&amp;nbsp;알지&amp;nbsp;못하게&amp;nbsp;되는&amp;nbsp;것이다.&amp;nbsp;그것이&amp;nbsp;진정으로&amp;nbsp;가장&amp;nbsp;놀라운&amp;nbsp;일일&amp;nbsp;테지만&amp;nbsp;말이다.&amp;nbsp;진짜로&amp;nbsp;놀라운&amp;nbsp;일은&amp;nbsp;사람들을&amp;nbsp;놀라게&amp;nbsp;하지&amp;nbsp;못한다.&lt;br /&gt;3:33&amp;nbsp;AM&amp;nbsp;Apr&amp;nbsp;6th&amp;nbsp;via&amp;nbsp;Chromed&amp;nbsp;Bird&lt;br /&gt;&lt;br /&gt;영화&amp;nbsp;'그린존'이&amp;nbsp;실패한&amp;nbsp;지점이&amp;nbsp;있다면,&amp;nbsp;그건&amp;nbsp;'본시리즈'가&amp;nbsp;성공한&amp;nbsp;지점과&amp;nbsp;같다.&amp;nbsp;본에게는&amp;nbsp;분명히&amp;nbsp;그가&amp;nbsp;찾고자&amp;nbsp;하는&amp;nbsp;것이&amp;nbsp;있었다.&amp;nbsp;하지만&amp;nbsp;'그린존'에는&amp;nbsp;없다.&amp;nbsp;이건&amp;nbsp;오히려&amp;nbsp;찾고자&amp;nbsp;하는게&amp;nbsp;너무&amp;nbsp;많았다는&amp;nbsp;뜻이다.&amp;nbsp;그는&amp;nbsp;처음에&amp;nbsp;WMD를&amp;nbsp;찾으려고&amp;nbsp;한다.&lt;br /&gt;그후에&amp;nbsp;그는&amp;nbsp;WMD의&amp;nbsp;부재를(그&amp;nbsp;증명을)&amp;nbsp;찾으려고&amp;nbsp;한다.&amp;nbsp;하지만&amp;nbsp;어떤&amp;nbsp;의미에서&amp;nbsp;그는&amp;nbsp;일종의&amp;nbsp;진실-정의를&amp;nbsp;찾으려고&amp;nbsp;하는&amp;nbsp;것이다.&amp;nbsp;하지만&amp;nbsp;그가&amp;nbsp;어느&amp;nbsp;위치에서,&amp;nbsp;찾으려고자&amp;nbsp;하는지는&amp;nbsp;모호한다.&amp;nbsp;이것도&amp;nbsp;사실은&amp;nbsp;너무나&amp;nbsp;분명해서&amp;nbsp;모호한&amp;nbsp;것이다.&lt;br /&gt;그는&amp;nbsp;일종의&amp;nbsp;심판자의&amp;nbsp;위치,&amp;nbsp;객관의&amp;nbsp;위치에서&amp;nbsp;사태를&amp;nbsp;주관하고&amp;nbsp;있다.&amp;nbsp;하지만&amp;nbsp;이러한&amp;nbsp;이유로&amp;nbsp;'제이슨본'이&amp;nbsp;찾고자&amp;nbsp;했던&amp;nbsp;것,&amp;nbsp;바로&amp;nbsp;자기&amp;nbsp;자신의&amp;nbsp;존재,&amp;nbsp;그&amp;nbsp;위치를&amp;nbsp;잃어버리고&amp;nbsp;있다.&amp;nbsp;그리고&amp;nbsp;분명히&amp;nbsp;말해서,&amp;nbsp;그가&amp;nbsp;찾고자&amp;nbsp;했던&amp;nbsp;진실-정의는&amp;nbsp;바로&amp;nbsp;그곳에&amp;nbsp;있다.&lt;br /&gt;5:09&amp;nbsp;AM&amp;nbsp;Apr&amp;nbsp;4th&amp;nbsp;via&amp;nbsp;web&lt;br /&gt;&lt;br /&gt;모든&amp;nbsp;음모론에는&amp;nbsp;진실이&amp;nbsp;담겨있다.&amp;nbsp;단순히&amp;nbsp;그&amp;nbsp;수많은&amp;nbsp;음로몬중에&amp;nbsp;몇&amp;nbsp;개&amp;nbsp;정도는&amp;nbsp;과녁을&amp;nbsp;맞춘다는&amp;nbsp;뜻만은&amp;nbsp;아니다.&amp;nbsp;진실이&amp;nbsp;음모의&amp;nbsp;형식을&amp;nbsp;필요로&amp;nbsp;한다.&amp;nbsp;그것은&amp;nbsp;음모처럼&amp;nbsp;작동하며,&amp;nbsp;작동될때&amp;nbsp;진실이란&amp;nbsp;지위를&amp;nbsp;얻는다.&amp;nbsp;이러한&amp;nbsp;과정을&amp;nbsp;통해&amp;nbsp;거짓도&amp;nbsp;진실이&amp;nbsp;되고,&amp;nbsp;우린&amp;nbsp;그것을&amp;nbsp;음모라&amp;nbsp;부른다.&lt;br /&gt;5:17&amp;nbsp;AM&amp;nbsp;Mar&amp;nbsp;29th&amp;nbsp;via&amp;nbsp;web&lt;br /&gt;&lt;br /&gt;당신이&amp;nbsp;결코&amp;nbsp;말할&amp;nbsp;수&amp;nbsp;없는&amp;nbsp;바로&amp;nbsp;그것이&amp;nbsp;여태껏&amp;nbsp;들어보지도&amp;nbsp;못한&amp;nbsp;것이죠.&amp;nbsp;-&amp;nbsp;소프라노스&amp;nbsp;中&lt;br /&gt;1:32&amp;nbsp;AM&amp;nbsp;Mar&amp;nbsp;23rd&amp;nbsp;via&amp;nbsp;Chromed&amp;nbsp;Bird&lt;br /&gt;&lt;br /&gt;총계는&amp;nbsp;항상&amp;nbsp;그&amp;nbsp;부분들의&amp;nbsp;합이지.&amp;nbsp;깨끗하고&amp;nbsp;분명하고&amp;nbsp;산뜻하고&amp;nbsp;절대적이지.&amp;nbsp;하지만&amp;nbsp;내&amp;nbsp;삶은,&amp;nbsp;그건,&amp;nbsp;합해지지&amp;nbsp;않았어.그건&amp;nbsp;다른&amp;nbsp;것들에&amp;nbsp;연결되지&amp;nbsp;않았지.나는&amp;nbsp;내&amp;nbsp;부분들의&amp;nbsp;합이&amp;nbsp;아니야.내&amp;nbsp;부분들&amp;nbsp;모두는&amp;nbsp;나한테&amp;nbsp;합해지지&amp;nbsp;않은&amp;nbsp;것&amp;nbsp;같아.&amp;nbsp;-&amp;nbsp;악마가&amp;nbsp;너의&amp;nbsp;죽음을&amp;nbsp;알기&amp;nbsp;전에&amp;nbsp;中&lt;br /&gt;7:37&amp;nbsp;PM&amp;nbsp;Mar&amp;nbsp;15th&amp;nbsp;via&amp;nbsp;Chromed&amp;nbsp;Bird&lt;br /&gt;&lt;br /&gt;&quot;작년,&amp;nbsp;제가&amp;nbsp;유럽&amp;nbsp;선수권&amp;nbsp;타이틀을&amp;nbsp;놓치고,니콜라이와&amp;nbsp;함께&amp;nbsp;앉아서&amp;nbsp;얘기했습니다.&amp;nbsp;만약&amp;nbsp;내가&amp;nbsp;쿼드(4회전)를&amp;nbsp;아주&amp;nbsp;잘&amp;nbsp;뛸&amp;nbsp;수&amp;nbsp;있다면,&amp;nbsp;만약&amp;nbsp;내가&amp;nbsp;그게&amp;nbsp;쉽다고&amp;nbsp;느낄&amp;nbsp;정도가&amp;nbsp;된다면&amp;nbsp;그건&amp;nbsp;내&amp;nbsp;인생을&amp;nbsp;바꾸겠죠&amp;nbsp;라고요.&amp;rdquo;(야구딘&amp;nbsp;인터뷰中)&amp;nbsp;이&amp;nbsp;해&amp;nbsp;그는&amp;nbsp;금메달은&amp;nbsp;딴다.&lt;br /&gt;5:29&amp;nbsp;PM&amp;nbsp;Mar&amp;nbsp;4th&amp;nbsp;via&amp;nbsp;Chromed&amp;nbsp;Bird&lt;br /&gt;&lt;br /&gt;대중이&amp;nbsp;항상(아니,&amp;nbsp;대부분이라도)&amp;nbsp;올바른&amp;nbsp;판단을&amp;nbsp;내릴&amp;nbsp;거라는&amp;nbsp;믿음은,&amp;nbsp;군사독재가&amp;nbsp;없었다면&amp;nbsp;이&amp;nbsp;나라가&amp;nbsp;이렇게&amp;nbsp;발전할수&amp;nbsp;없었을&amp;nbsp;거라는&amp;nbsp;믿음만큼이나&amp;nbsp;위험해&amp;nbsp;보인다.&amp;nbsp;민심이&amp;nbsp;천심이라는&amp;nbsp;말은,&amp;nbsp;천심(민심)이&amp;nbsp;옳다는&amp;nbsp;게&amp;nbsp;아니라,&amp;nbsp;아무&amp;nbsp;내용도&amp;nbsp;없다는&amp;nbsp;뜻이리라.&lt;br /&gt;요컨대&amp;nbsp;천심은&amp;nbsp;옳을&amp;nbsp;수&amp;nbsp;없을&amp;nbsp;뿐만&amp;nbsp;아니라&amp;nbsp;틀릴&amp;nbsp;수도&amp;nbsp;없다.그래도&amp;nbsp;그것은&amp;nbsp;하나의&amp;nbsp;명령처럼&amp;nbsp;작용하는데,&amp;nbsp;그&amp;nbsp;명령은&amp;nbsp;불가해하며&amp;nbsp;맹목적이다.&amp;nbsp;무조건적이고&amp;nbsp;외설적이다.&amp;nbsp;마치&amp;nbsp;(칸트의)&amp;nbsp;정언명령처럼&amp;nbsp;말이다.&lt;br /&gt;4:52&amp;nbsp;AM&amp;nbsp;Feb&amp;nbsp;28th&amp;nbsp;via&amp;nbsp;Chromed&amp;nbsp;Bird&lt;br /&gt;&lt;br /&gt;&amp;ldquo;시인이나&amp;nbsp;소설가도&amp;nbsp;무법천지&amp;nbsp;시위현장에&amp;nbsp;나와&amp;nbsp;불을&amp;nbsp;지를&amp;nbsp;수는&amp;nbsp;있다.그러나&amp;nbsp;그런&amp;nbsp;행태를&amp;nbsp;하면서도&amp;nbsp;세금을&amp;nbsp;지원&amp;nbsp;받아야겠다는&amp;nbsp;생각은&amp;nbsp;몰염치거나&amp;nbsp;거지&amp;nbsp;근성이다.&amp;rdquo;라는&amp;nbsp;조선사설..&amp;nbsp;여기에는&amp;nbsp;두가지&amp;nbsp;바닥이있다.&amp;nbsp;첫째,&amp;nbsp;시위는&amp;nbsp;무법천지다.&amp;nbsp;둘째,&amp;nbsp;세금은&amp;nbsp;정부거다.&amp;nbsp;시발.&lt;br /&gt;5:59&amp;nbsp;AM&amp;nbsp;Feb&amp;nbsp;22nd&amp;nbsp;via&amp;nbsp;Chromed&amp;nbsp;Bird&lt;br /&gt;&lt;br /&gt;자신이&amp;nbsp;좋아하는&amp;nbsp;선수가&amp;nbsp;너무&amp;nbsp;유명해져서&amp;nbsp;아쉬움을&amp;nbsp;느끼는&amp;nbsp;것은,&amp;nbsp;단순히&amp;nbsp;나만&amp;nbsp;좋아했으면&amp;nbsp;좋겠다는&amp;nbsp;욕심&amp;nbsp;때문만은&amp;nbsp;아니다.&amp;nbsp;그것은&amp;nbsp;그&amp;nbsp;명성이라는&amp;nbsp;것이,&amp;nbsp;그녀&amp;nbsp;자신과&amp;nbsp;상관없는&amp;nbsp;또&amp;nbsp;다른&amp;nbsp;이미지를&amp;nbsp;만들어내기&amp;nbsp;때문이다.&amp;nbsp;물론&amp;nbsp;그녀&amp;nbsp;자신이란&amp;nbsp;것을,&amp;nbsp;난&amp;nbsp;알지&amp;nbsp;못한다.&amp;nbsp;다만&amp;nbsp;나름으로&amp;nbsp;만들어,&amp;nbsp;내&amp;nbsp;이야기&amp;nbsp;속에&amp;nbsp;등장시켜&amp;nbsp;왔을&amp;nbsp;뿐이다.&amp;nbsp;하지만&amp;nbsp;명성은&amp;nbsp;다른&amp;nbsp;이야기고,&amp;nbsp;분명&amp;nbsp;그녀&amp;nbsp;자신도&amp;nbsp;그이야기를&amp;nbsp;낯설어할&amp;nbsp;것이다.&amp;nbsp;그것을&amp;nbsp;그녀가&amp;nbsp;잘&amp;nbsp;받아들이고&amp;nbsp;있는지는&amp;nbsp;모르겠다.&amp;nbsp;하지만&amp;nbsp;난&amp;nbsp;좀&amp;nbsp;그렇다.&amp;nbsp;하지만&amp;nbsp;여전히&amp;nbsp;그녀의&amp;nbsp;'록산느의&amp;nbsp;탱고'는&amp;nbsp;최고다.&lt;br /&gt;2:43&amp;nbsp;AM&amp;nbsp;Feb&amp;nbsp;20th&amp;nbsp;via&amp;nbsp;Chromed&amp;nbsp;Bird&lt;/p&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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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9 Apr 2010 09:22:5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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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외할머니의 볶음밥</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70</link>
      <description>&lt;p&gt;어렸을 때 학교에 갔다오면 점심으로 두 가지 메뉴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김치볶음밥과 라면이다. 이제 생각하면 보온밥솥이 아니라서 찬밥 밖에 낼게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랬다. 예전에는 스텐레스 밥그릇에 뜨거운 밥을 담아서 이불같은데 넣어두고는 했다. 그건 외할머니의 메뉴였다. 특별히 어느 쪽을 좋아하고 자주 선택했는지 모르겠지만, 김치볶음밥은 정말 매웠다. 나중에 내가 스스로 밥을 챙겨먹을 때 즈음 그 김치볶음밥이란 걸 해봤다. 근데 아무리해도 그렇게 매운 맛을 낼 수가 없었다. 김치가 달라서? 아님,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뭐가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생각하면 그건 고작 김치볶음밥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김치와 밥밖에 없었다.&lt;/p&gt;&lt;p&gt;내가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 즈음에 '코코프라이드라이스'라는 볶음밥 전문집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철판볶음밥전문점이었다. 카운터에 앉으면 볶는 걸 직접 볼 수도 있다. 당시로는 인테리어도 세련된 서구식이었고, 눈앞에서 볶는다는지 하는 획기적인 서비스형태도 그렇고 해서 꽤나 인기를 끌었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자친구, 또는 이제 막 만난 소개팅녀를 데리고 갈 법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만큼 맛있었냐하면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매운 음식이나, 뜨거운 국물음식을 좋아하는 탓도 있다. 하지만 그 집을 생각하면 마음이 좀 흐뭇해지는데, 그건 표현 그대로 '풋풋했던' 그 시절이 떠오르기 때문이다.&lt;/p&gt;&lt;p&gt;비법이 뭘까? 어떻게 외할머니의 볶음밥은 그렇게 매웠을까? 소금을 더 쳐볼까? 아님 다진 마늘을 넣어봐야 하나. 김치를 먼저 볶아보기도 하고, 밥을 먼저 볶아보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도 그 맛이 나오지 않는다.&lt;/p&gt;&lt;p&gt;외할머니는 집에서 돌아가셨다. 나는 그 밤에 그 집에 찾아갔다. 사람들이 침대 주위에 모여 있었고, 나는 몇발짝 떨어져 서 있었다. 얼마 있다 앰블런스가 왔다는 말이 전해졌다.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구급요원들이 들것을 가지고 들어왔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야만 했는데 들것을 뉘인 채로 타기에는 너무 좁았다. 어쩔 수 없이 세워야만 했다. 내내 외할머니는 하얀 천으로 덮여져 있었다. 몇층인가에서 문이 열리고 아줌마 하나와 아이 하나가 문밖에 서 있었다. 그냥 보내버릴 법도 한데 무슨 급한 일이 있었던지 아줌마는 아이를 데리고 기어이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아이는 비뚜름하게 기울여 세워져 있는 들것을 봤다. 나는 그런 아이의 시선을 계속 좆고 있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다. 마침내 아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외할머니의 볶음밥을 먹던 나이보다는 몇 살쯤 어려보였다. 그리고 내가 코코프라이드라이스에서 실없는 농담이나 지껄이며 여자를 만나던 나이보다는 훨씬 더 어렸다.&lt;/p&gt;&lt;p&gt;이제 그 아이는 그 시절의 나만큼이나 나이를 먹었을 것이다. 자위행위도 하게 되고, 어쩌면 섹스도 이미 경험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는 게 가능하다면 우리 세대는 이제 더 이상 젊지 않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뭐라해도 좀 씁쓸한 일이다. 하지만 뭐가 있겠는가? 인생이란 게.&lt;/p&gt;&lt;p&gt;&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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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radiofish.tistory.com/570#entry570comment</comments>
      <pubDate>Tue, 2 Mar 2010 13:51:4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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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물고기통신 203</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69</link>
      <description>&lt;p&gt;차창문을 여니 봄냄새가 났다.도로와 나란한 하천 공원에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띠었다.농구코트에 공을 쫒아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만 같다.새학기의 냄새.뭐라해도 겨울의끝에 맡게 되는 봄냄새는 싫어할 수가 없다.&lt;br /&gt;11 minutes ago from Chromed Bird&lt;/p&gt;
&lt;p&gt;인디에어를 봤다. 집은 환상이다. 가족이나 결혼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환상없이 삶은 유지되지 않는다. 무의미해진다. 조지클루니는 그 무의미를 고통스럽게 견딘다. 단지 숫자일 뿐인 천만 마일리지라는 긍지. 하지만 사람들이 삶(환상) 속에서, 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해고당할 수 있는) 집에서 일상의 잠을 청할 때, 클루니는 별보다 더 환환 빛으로 공중(무의미)을 날고있다. 환상이라는 땅보다 더 단단한 무의미의 공중(air).&lt;br /&gt;about 18 hours ago from Chromed Bird&lt;/p&gt;
&lt;p&gt;때로 제품에 대한 논쟁의 끝에, 자기가 만족하면 그만,자기한테 편하고 유용하면 그만이라는 말이 나올 때가 있다. 이건 쉽게 반박할 수 없는 말이지만,그렇기 때문에 날 불편하게 한다.여기에 양시양비론을 갖다댈 수 있고, 사이비 중립성을 갖다댈수 있다.&lt;br /&gt;하지만 보다 즉각적으로 내게 느껴지는 것은, 어떤 절대성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다. 이것은 반대로 개방성, 다양성에 대한 호의와 연결되는데, 아무튼 이제 절대니 보편이니 하는 말들은 아무도 쓰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진리라는 말도, 농담이 되어 버렸다.&lt;br /&gt;2:18 PM Feb 18th from Chromed Bird&lt;/p&gt;
&lt;p&gt;가끔은 자기가 절대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 실망할 필요가 있다. 후에 만일 그가 실수하고, 배반하고 끝내 패배하게 될 때, 우리가 느끼는 절망감의 일정부분을 덜어낼수 있을 테니까. 사랑과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실망하고 거부할 수 있다면, 그게 사랑일 수 있을까?&lt;br /&gt;6:41 PM Feb 17th from Chromed Bird&lt;/p&gt;
&lt;p&gt;뭔가를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일을 도리어 망치는 경우가 있다.이건 잘하려는게 문제가 아니라 못하는 걸 피하려는 게 문제다. 때로 가장 잘 못하는게, 가장 잘하는 일이라는 식의 마음가짐이 필요다. 사실 따져보면 잘한다고 하는게 대개 잘 못하는 일이다.&lt;br /&gt;7:44 PM Feb 16th from Chromed Bird&lt;/p&gt;
&lt;p&gt;아침이면 방문밖에서 고양이가 운다. 문턱나무를 긁고 낑낑댄다. 어쩔수없이 방문을 열어주고 도로 침대에 눕는다. 그럼 고양이는 슬며시 방으로 들어와 침대 위로 훌쩍 뛰어올라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본다. 마치 살아있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응. 살아있어.&lt;br /&gt;4:41 AM Feb 14th from web&lt;/p&gt;
&lt;p&gt;영화 로드를 봤다. 영화내내 너무 어두웠다. 말그대로 그냥 화면이 어두웠다. 원작에 아주 충실하게. 감독이 원작에 너무 압도당한게 아닌가 싶지만.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lt;br /&gt;8:55 PM Feb 11th from web&lt;/p&gt;
&lt;p&gt;짜게 식힌다는 말이있다. 난 이걸 디씨에서 배웠는데, 찌질이글에 댓글 달지말라는 거다. 애인이스토커로 변했을때 할 수있는 최선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거라고 한다. 화내지도 욕하지도. 이런 부정의 반응을 그는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짜게식혀야한다.&lt;br /&gt;근데 이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왜냐면 화나고 욕도 나오기 때문이다. 어쨌든 찌질이를 이길 수있는 방법은 없다. 근데 그 찌질이가 티비와신문에 나오는 사람이라면. 내 삶의 어떤부분을 결정할만한 위치에 있다면. 빌어먹을, 도저히 짜게 식힐 수가 없다.&lt;br /&gt;4:45 PM Feb 11th from web&lt;/p&gt;
&lt;p&gt;대개 초보(신인)들의 글이 실패하는 지점은, 짧은 얘기가 길게 느껴지는 데 있다. (반면에 고수는 긴 얘기가 짧게 느껴진다. 이게 보편적 기준은 아닐테지만.) 그건 그들이 너무나 많은 얘기를 그 안에 담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의형제는 긴 얘기인데 충분히 짧게 느껴진다. 좋은 영화라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솜씨가 좋다. 고작 두번째 작품인 신인감독임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다. 항상 그렇듯이,영화를 진지하고 무겁게 만드는 것만큼 가볍고 쉽게 만드는 것도 어렵다. 다음 작품이 기대.&lt;br /&gt;3:51 AM Feb 11th from web&lt;/p&gt;
&lt;p&gt;물론 (때때로, 또는 대개) 내가 인터넷상이나 어디나 누군가와 논쟁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설득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내가 이기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내가 이겼다고 인정해주길 바라서다. 이것은 논쟁의 본질일까, 과잉일까?&lt;br /&gt;1:57 PM Feb 10th from web&lt;/p&gt;
&lt;p&gt;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라는 말이 있다. 근데 생각해보면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려 해도 자기 자신에 충분히 가까워질 수도 없는 것 같다. 침대에서 잠들기까지 깨어있는 시간이 점점 더 힘들어진다.&lt;br /&gt;4:12 AM Feb 10th from twtkr&lt;/p&gt;
&lt;p&gt;&lt;br /&gt;아마도 금감원의 액티브X 보안권고는 (조선의 스마트폰 결제에 관한 사설을 보면) 단순히 그들이 게으르거나 멍청했기 때문인 것같다. 물론 그 '단순함'이 결코 사소하지는 않겠으나, 따져보면 세상의 많은 악(재앙)등은 그런 단순함에서 비롯되는게 아닐까?&lt;br /&gt;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단순한 악'이 더 무서운 법이다. 진짜 무서운 건, 그들이 마치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심지어 그들 자신에게도 아무 이득이 없는(것 같은) 일을 밀어붙일 때다. 때때로 우익(할아버지)들이 그런데, 이에 반해, 이에 맞서는 사람들은 너무나 생각이 많다. 물론 그들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는 건 아닐테지만, 반대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악뿐만 아니라 선도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을 때, 그 단순성으로 힘을 발휘하는 게 아닐까?&lt;br /&gt;5:54 AM Feb 8th from web&lt;/p&gt;
&lt;p&gt;&quot;그때는그에게 안부 전해줘&quot;라는 일본영화가있다.&quot;세상의 중심에서...” 작가의 원작 영화인데 제목이 영화대사 중에 나온다. 재밌다거나 좋다고 확 말하긴어렵지만 묘한 분위기가 있다.일본작가들에게는, 당연한 얘길테지만 그런 묘한 일본스러움이 있다. 하루키조차그렇다. 난 그거 좋다고본다.&lt;br /&gt;4:56 AM Feb 7th from TwitBird iPhone&lt;/p&gt;
&lt;p&gt;내 선배 작가는 이십여년 전에 삼성광고를 찍었다.난 그의등단작이 독재정권을 풍자한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들었다.이게 아무문제가 되지 않는걸까?삼성이나, SK, 또어떤 불온한 출생과 성장을 거친 대기업광고에 출연하는 일이,그들에겐 망설임없는일이 되는걸까?&lt;br /&gt;3:05 AM Feb 7th from web&lt;/p&gt;
&lt;p&gt;고양이가 침대에 오줌을 자주 싼다. 별 짓을 다해봐도 고쳐지질 않는다. 지식인에 물어보니 고양이가 내게 불만을 가졌을지 모른다고 한다. 관심과 애정이 부족하다는 거다. 곰곰 생각해봤는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줌을 싸는 건 고양이의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다.&lt;br /&gt;1:32 AM Feb 6th from web&lt;br /&gt;&lt;br /&gt;대중을 사랑하는 것과 신뢰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거꾸로 말하면 대중을 신뢰한다고, 옳다고 말하는 자는 대중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당신을 완전히 신뢰하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의미없는 말인지?&lt;br /&gt;7:46 PM Feb 3rd from web&lt;/p&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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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radiofish.tistory.com/569#entry569comment</comments>
      <pubDate>Sat, 20 Feb 2010 16:33:1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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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I'm still alive</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68</link>
      <description>&lt;iframe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NXCwzGY-K0&quot; width=&quot;854&quot; height=&quot;510&quot; frameborder=&quot;&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gt;&lt;/iframe&gt;

&lt;font size=&quot;2&quot;&gt;This was a triumph.&lt;br /&gt;큰 업적이로군요.&lt;/fon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I’m making a note here: HUGE SUCCESS!&lt;br /&gt;여기 기록해 두기로 해요: 대성공!&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It’s hard to overstate my satisfaction&lt;br /&gt;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만족스러워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Aperture Science &lt;br /&gt;에퍼쳐 사이언스&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we do what we must because we can &lt;br /&gt;우린 할수 있기에 반드시 해야할 것을 하죠.&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For the good of all of us except the ones who are dead.&lt;br /&gt;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죽은 사람은 빼고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But there’s no sense crying over every mistake,&lt;br /&gt;그러나 매 실패마다 울 수는 없는 일이예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you just keep on trying til you run out of cake&lt;br /&gt;당신은 계속 시도해야 해요, 케이크가 바닥날때 까지&lt;br /&gt;&lt;/font&gt;&lt;font size=&quot;2&quot;&gt;&lt;br /&gt;And the science gets done and you make a neat gun&lt;br /&gt;그리고 연구가 완료되면 당신은 멋진 총을 만들겠죠.&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for the people who are still alive!&lt;br /&gt;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I’m not even angry&lt;br /&gt;전 화나지 않았어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I’m being so sincere right now&lt;br /&gt;전 지금까지도 침착하답니다.&lt;br /&gt;&lt;br /&gt;Even though you broke my heart and killed me.&lt;br /&gt;당신이 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절 죽여 버렸어도 말이죠.&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And tore me to pieces&lt;br /&gt;저를 조각 조각내고&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And threw every piece into a fire&lt;br /&gt;조각들을 전부 불속에 던져 버렸죠.&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As they burned it hurt because I was so happy for you&lt;br /&gt;당신덕분에 행복했기에 불타 버릴 땐 아프더군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Now these points of data make a beautiful line&lt;br /&gt;이제 데이터의 점들은 아름다운 선을 이루었어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And we’re out of beta, we’re releasing on time&lt;br /&gt;이제 베타는 끝났으니, 제 시간에 나올 수 있겠군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So I’m glad I got burned &lt;br /&gt;그렇기에 불타버렸어도 전 행복해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think of all the things we learned&lt;br /&gt;우리가 배운 모든 걸 생각해 보세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for the people who are still alive!&lt;br /&gt;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Go ahead and leave me &lt;br /&gt;가보세요, 전 버려두고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I think I prefer to stay inside&lt;br /&gt;전 아직 안에 남아있는게 좋을 것 같네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Maybe you’ll find someone else to help you&lt;br /&gt;당신은 아마 당신을 도울 누군가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Maybe Black Mesa.&lt;br /&gt;블랙 매사일지도 모르죠.&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That was a joke, HA HA FAT CHANCE&lt;br /&gt;농담이었어요, 하 하 어림도 없죠.&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Anyway, this cake is great&lt;br /&gt;그나저나, 이 케이크 정말 대단하군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It’s so delicious and moist&lt;br /&gt;정말 맛있고 촉촉해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Look at me, still talking when there’s science to do.&lt;br /&gt;절 봐요, 여전히 할 연구가 남았다 말하고 있어요.&lt;br /&gt;&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When I look up there, it makes me glad i’m not you&lt;br /&gt;당신을 볼 때면, 제가 당신이 아니란 점이 기쁘군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I’ve experiments to run&lt;br /&gt;전 해야 할 실험이 있어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There is research to be done&lt;br /&gt;끝내야할 조사가 있어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on the people who are still alive!&lt;br /&gt;살아있는 사람들을 이용해서!&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And believe me I am still alive&lt;br /&gt;그러니 절 믿어요, 전 아직 살아있어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I’m doing science and I’m still alive&lt;br /&gt;나는 연구를 하죠 그래서 전 살아있어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I feel fantastic and I’m still alive&lt;br /&gt;기분 끝내주네요 그래서 전 살아있어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While you’re dying, I’ll be still alive&lt;br /&gt;당신이 죽어갈 때, 전 살아있을 거예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And when you’re dead, I will be still alive&lt;br /&gt;당신이 죽어도, 전 살아있을 거예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font size=&quot;2&quot;&gt;still alive&lt;br /&gt;살아 있어요.&lt;/fon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gt;&lt;font size=&quot;2&quot;&gt;still alive&lt;br /&gt;살아 있어요.&lt;/font&gt;&lt;p&gt;&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책갈피</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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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 Feb 2010 00:58:0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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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물고기통신 202</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67</link>
      <description>&lt;div&gt;군대시절 황금마차라는 게 있었다. 일종의 이동식 매점인데, 노란색 트럭에 이것저것 싣고 산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부대를 돌아다녔다. 먹을 걸 사먹으려면 그것밖에 없었다. 물론 특별히 물자가 부족했던 건 아니었다. 그렇게 외따로 떨어진 부대일 수록, 사실 먹을 거는 풍족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황금마차가 오면 신이 나서 달려나갔다. 과자니, 탄산음료니, 레트로 치킨이니 만두니 하는 걸 잔뜩 사서 내무반으로 돌아와 근무를 마친 부대원들과 작은 파티를 벌였다. 황금마차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고, 잊어버리고 있을 때도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노란색 트럭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심지어 짠밥이 돼서 별 먹고 싶은 것도 없고, 파티를 벌이는 것도 지겨웠을 때조차도, 그래서 네들이나 먹으라며 따로 떨어져 괜히 혼자 있을 때조차도, 그 노란색은 나를 기분좋게 했다. 나는 그것을 황금마차라고 부르기 시작한 게 단지 그게 노란색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우연인지, 아님 처음부터 황금마차라는 이름을 짓고 그 다음에 노란색으로 칠하게 되었는지 몰랐다. 또 그 황금마차라는 이름이 원래 어딘가, 동화같은 데서 쓰였던 건지, 아님 그게 최초의 명명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나는 황금마차라고 하면 그 이동식 매점이 떠오른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게 그냥 어느날 내 집 앞에 다시 왔으면 좋겠다.&lt;/div&gt;&lt;div&gt;(1 minute ago)&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모든 폭력 중에 가장 나쁜 것은, 사랑의 폭력이다. 이른바 사랑하기 때문에 때린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맞는 것은 무엇보다 끔찍하다. 사랑의 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만일 누군가를 때려야 한다면, 그에게, 또는 그녀에게 사랑하기 때문에 때린다는 식이면 안된다. 그렇다고 미워하기 때문에, 증오하기 때문에 그래서도 안된다. 가장 좋은 것은 폭력 그 자체를 위한 폭력이다. 거기에는 일종의 법적인(무주관적인) 엄격함이 필요하다. 기계적이 되어야 한다. 내가 너를 때리는 것은 때려야만 하기 때문에 때리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좋다. 누구에게도 폭력 그 이상의 상처를 주지 않는 유일한 벙법이다. 이것을 진정한 폭력이라고 부를까? 마치 진정한 사랑과도 같이.&lt;/div&gt;&lt;div&gt;(3 days ago)&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공부의 신이 학생과 선생을 입시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표현한다고 비판하는, 어느 진보적인 매체의 기사를 봤다. 어이없는 기사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왜냐하면 누구나 알다시피 그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현실이라 말하는 것으로, 비판받는다면, 이 비판은 누구를 위한 걸까? 이런 내용이 기득권 이데올로로기를 표현하다고? 뭣도 모르는 소리다. 기득권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는 것은, 그 반대다. 공부의 신이 진짜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한다면, 실제로 1등을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가져가는 기득권층이다. 진짜로 기득권층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정의가 승리하는 이야기다. 착한 사람이 행복해지는 이야기다. 꼴지부터 1등까지 모두 행복해지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실제로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아, 얼마나 천박한 비판인가?&lt;/div&gt;&lt;div&gt;(3 days ago)&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교황청이 아바타를 혹평했다고 한다. 나는 교황청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물론 그 혹평이 아바타의 부분적인 면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면에서 아바타의 원형이라 할만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확실히 한발 더 나아가 있다고 느낀다. 그곳에서는, 바람계곡에서는 자연도 인간도 모두 훼손되어 있다. 그 훼손됨, 그 근원적이라할만한 결핍을 자연과 인간 모두가 구하기 위해 애쓴다.&lt;/div&gt;&lt;div&gt;(1 week ago)&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확실히 언론은 작동한다. 어떻게 저런 말도 안되는 말을 대담하게 지껄일 수 있지, 라고 놀라워하다가도, 그게 작동한다는 사실에 더 놀라워진다. 확실히 작동한다. 때로 저러다 망가지고 말지, 더 이상 작동 안하게 되지 생각했다. 아무도 언론을 믿지 않는다면? 하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 그 믿음이 진실을 향한 믿음은 처음부터 아니었으니까. 믿음은 항상 진실에 대한 믿음이고, 그 중 진실되지 않은 것을 골라내려고 하는 노력은, 언제나 믿음 그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테니까.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진실은 포기할 수 있었도, 믿음은 포기할 수 없다.&lt;/div&gt;&lt;div&gt;(2 weeks ago)&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아바타가 감독의 전작에 비해 맥이 빠지는 부분은, 인간이 그들에게 아무 것도 줄게 없다는 말이 나올 때다. 현실적으로 그들이 패배하는 것은 그들이 무언가를 바라기 때문이고, 승리하는 것은 그것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결핍이 없는 어떤 공동체를 자꾸 그려내는 것은 일종의 마약과도 같다. 그건 결핍 그 자체가 어떤 감당할 수 없는 전체로써 우리를 위무하기 때문이다.&lt;/div&gt;&lt;div&gt;(2 weeks ago)&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사람과의 일중에 아주 미묘해지는 순간이 있다. 아주 작은 변화의 순간이 있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져서 뭔가 달려졌지 궁금해하다 문득 도로 위에 차들이 아주 적어진 걸 발견할 때처럼. 마치 눈이 엄청나게 온 날 처럼. 세상이 온통 다 바뀌었는데도 갑자기 줄어둔 소음만이 유난히 마음을 붙잡는 것이다. 작은 표정의 변화, 약간의 침묵, 목소리에 실린 어떤 차분한 느낌. 모든 게 달라졌는데도, 난 그런 작은 변화들에 더 마음이 아프다.&lt;/div&gt;&lt;div&gt;(2 weeks ago)&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 옛날, 아주 어렸을 때, 처음으로 컴퓨터가 집에 들어온 날, 가장 먼저 했던 일중의 하나가 여자사진을 보는 일이었다. 그건 누드는 아니었고, 그저 좀 야한 사진이었는데, 한 장이 다 뜨려면 악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요컨대 위쪽 얼굴에서부터 조금씩 아래쪽으로 화면이 완성되는 식이었다. 이런 걸 보면 프로이트의 범성욕주의라는 개념이 경험적으로 이해된다. 조금씩 내려가는 화면을 보면서 두 손 꽉 쥐고 기다릴 때의 그 흥분이란!!!&lt;/div&gt;&lt;div&gt;(2 weeks ago)&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남녀사이의 오해에 대해 난 어쩔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해를 푼다해도, 마음이 돌아온다해도, 이미 거기까지 갔던 길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난 애써 그것을 풀려고 하지 않는다. 이미 무엇도 예전과 같아질 수 없다. 그런데 문득 그녀가 정말 바랐던 것은, 오해를 풀려는 나의 노력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녀가 나를 떠났던 건 오해 때문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lt;/div&gt;&lt;div&gt;(2 weeks ago)&lt;/div&gt;&lt;div&gt;&lt;br /&gt;&lt;/div&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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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radiofish.tistory.com/567#entry567comment</comments>
      <pubDate>Fri, 22 Jan 2010 18:37: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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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물고기통신 201</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66</link>
      <description>&lt;p&gt;예전에는 '빠'들이 소위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빠순이라든지, 황우석빠, 심형래빠 기타 등등. 근데 요즘에는 '빠'를 까는, 소위 이성적이고 균형잡히고 순수하게 중립적인 '척' 하는 사람들이 더 구역질이 난다. 자신들이 그 모든 일에 아무 연관도 없는 것처럼, 또 연관이 있어도 자신은 항상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무지막지한 이성적 능력을 가진 것처럼.&lt;/p&gt;&lt;div&gt;때로 그들은 언론을 심하게 비난하고는 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그들 자신이 비난하는 언론 그 자체인 것처럼 구는 것 같다. 아무도 이 일에 무관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무관함 그 자체가 그들에게 어떤 특권을 가져다주는 양 구는 게 문제다. 이를테면 아무도 이 일에 무관할 수 없다고, 그들은 무관한 것처럼 말한다. 그들이 그 일에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무관하다는 걸 비난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무관한 자들의 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만 무관하다.&lt;/div&gt;&lt;div&gt;From Tumblr Dec 28th, 2009 9:16am&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아이폰을 쓰면서, 또 어떤 IT기기를 쓰면서 많은 경우에 리셋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는 걸 안다. 이걸 뭐라고 해야할까? 나는 어떤 우익들이, 또 보수주의자들이 사회의 리셋을 원하는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일종의 사회개조랄까, 사회재개발이랄까? 다른식으로 말하면, 게시판을 청소한다고 할까? 찌질이들을 몰아내자. 악플러들을 강퇴시켜라. 리셋이다. 아마 당신은 여기서 나치의 인종청소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당신은 그것을 악이라고 규정지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은, 또 지식인들은 그것에 강한 거부감을 표현할 것이다. 하지만 또한 당신은 순전히 형식적인 면에서, 리셋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거기에 숱한, 또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내용적 차이가 있음에도, 리셋이 아닌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아마 순전히 형식적인 면에서, 그래도 무슨 차이를 찾아내야 한다면, 진짜 혁명은 자기 자신까지도 혁명의 대상에, 제거해야 할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바이러스나 버그, 또 찌질이가 되어야 한다는 정도? 때로 나는 어떤사람들이 구원받을만한 가치도 없다고 생각할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그들이 구원받을 수 없다면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을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게 맞을 것이다. 구원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lt;/div&gt;&lt;div&gt;From Tumblr Dec 26th, 2009 9:08am&lt;/div&gt;&lt;p&gt;&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guid isPermaLink="true">https://radiofish.tistory.com/566</guid>
      <comments>https://radiofish.tistory.com/566#entry566comment</comments>
      <pubDate>Tue, 29 Dec 2009 01:30:02 +0900</pubDate>
    </item>
    <item>
      <title>내 편</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64</link>
      <description>&lt;p&gt;&lt;p&gt;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얘기다. 기억이란 참 이상한 것이어서, 어떻게 지금껏 그 일을 기억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는데,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거나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였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대개 그러한 공터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낮에는 비어있다. 무슨 일인가로 나는 누군가와 말싸움을 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또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추측해보건대, 그건 대단한 싸움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호전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항상 움츠려있고, 소심한 편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다. 그 시절의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그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이 기억이 여전히 내게 남아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 수 있는. 어쨌든 그 싸움에 대해 내 기억이 집중돼 있는 것은 아니다. 사건은 그 말싸움의 측면에서 불쑥 끼어든다. 즉, 누군가 – 역시 이 누군가도 나는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지만, 나와 꽤 친하게 지냈던 녀석이라는 느낌이 든다 – 갑자기 끼어들어 이런 말을 내게 한다. ‘넌 욕을 너무 많이 해.’&lt;/p&gt;&lt;p&gt;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그 말에 동조한다. ‘그래. 그래.’ 그런가? 나는 그 시절 욕을 많이 하는 거친 녀석이었나. 사실은 이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내 심정과 똑같이 깜짝 놀라고 당황했으니까. 그러니까 사실은 내가 어떤 종류의 욕을 섞어서 말하기 좋아했지만 그건 일종의 말하기 방식에 불과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우리가 흔히 경험하듯이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 사람들이 동향친구와 사투리로 대화할 때 자연스럽게 거기에 따라붙는 욕처럼. 물론 그건 내 생각일 뿐이고, 다른 친구들은 그걸 불편하게 여겼을 수도 있다.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내가 과연 다른 사람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일을 거침없이 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나,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누구라도 내게 진작에 주의를 줬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나는 소심쟁이였지, 결코 대장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말에 욕을 섞기 좋아한 것도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 다음에 나는 애초에 말싸움을 했던 상대와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그 이유도 상관이 없어졌고, 그래서 결국 누가 맞았는지 틀렸는지도 상관이 없어졌다. 왜냐하면 나는 그 자리에서 단박에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나쁜 아이가 되어버렸으니까. 이 다음도 재밌다. 결국 나는 그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더 이상 그들의 놀이에 낄 수가 없었다. 다른 애들이 나보고 가라고 했는지, 내 스스로 괜한 오기를 부리며 씩씩거리며 돌아섰는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아주 의기소침해져서 슬며시 빠져나왔을 수도 있다. 그 기억이 아주 생생하다. 혼자 돌아가는 길.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어떤 방식으로 그 자리를 떠났는가와 상관없이 매우 분명한 사실은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내 편이 없었다.&lt;/p&gt;&lt;p&gt;돌이켜보면 나는 본능적으로 누구와 편을 먹는데 익숙하지 않았던 것 같다. 거부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건 아마도 내가 편들만큼 좋은 편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런 좋은 편이 있었는데 그들은 나를 끼워주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단순히 ‘편듬’ 자체를 싫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설명할 때도 있다. 그게 왠지 멋져보였기 때문이다. 고독한 아웃사이더 같은. 하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내가 얼마나 간절히 내 편을 원하는지 안다. 내가 어딘가에 속하기를, 그래서 단순히 그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내 자신의 지위가 올라가고,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길 바라는지.&lt;/p&gt;&lt;p&gt;어떤 편,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좋게 말하거나 나쁘게 말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물론 때로 그렇게 말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 말만으로 부당한 대우나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도 쉽다. 이를테면 아프리키나 또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어느 나라에 가서 그 비참한 삶을 보고, 껴안고,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일 같은 거. 이를테면 어떤 부당한 일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내는 거. 그들의 편에 서는 거. 나는 그들이 어떤 정당한 편이나 좋은 편에 속해있는 사람들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가만히 바라보면 나는 그들이 마치 누구의 편도 아닌 것처럼, 동시에 마치 이 세상 모두의 편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느낀다. 그것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아주 불편하게 한다. 그러한 태도야말로 가장 무서운 허위에 감싸여 있는 것이다. 나는 단순히 그들이 거짓을 행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이, 또 그러한 일들이 이전보다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들이 일종의 어떤 거대한 음모를 배경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어뗜 면에서는 그들 스스로가 자신이 누구의 편도 아니고,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편이라고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이렇게 말로 해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그냥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lt;/p&gt;&lt;p&gt;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은 그 불가능한 일을 한다. 좀 더 그럴듯하게 표현하자면 그 불가능성 위에 서 있고자 한다. 이 경우, 우리는 이 ‘불가능한 위치’를 일종의 어떤 ‘있음’으로, ‘있는 위치’로 바꾸는 마법 같은, 그러나 아주 흔히 이뤄지는 작용을 본다. 대담하게 말하자면 그 마법 같은 일은, 이미 우리 모두가 행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마법은 지금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인 것이다.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와 같은. 다르게 말하면 우리들 모두는 ‘어떤 현실적인 편’에 속하기 위해, 그 이전에, 이미 ‘불가능한 편’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또 어떤 그들이, 그 ‘불가능한 편’에 속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그들은 단지 본래의 그들 자신이 되고자 원하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그 ‘불가능성’과 그 ‘불가능한 어떤 위치’를 가르는 아주 미묘한 틈새에 있다. 단지 우리가 어느 ‘현실적인 편’에, 이를테면 보수나 진보에, 좌익이나 우익에, 지배층과 피지배층, 서민과 중산층, 남성이나 여성의 편에 속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또 그 편에 속해있다면, 그건 그냥 바람직한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옳은 편도, 나쁜 편도 있다.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행하는 편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편을 든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나쁜 것은, 그래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앞서 말했듯이 ‘불가능한 편’에 속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만일 진정한 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편도 아니길 원하는 사람, 그러면서 모두의 편이길 바라는. 왜냐하면 만일 누군가 진실로 그 편에 속해있다면, 그는 이미 ‘인간’도 아닐 테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두고 인간도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영원히 인간 사회에서 배제되어야 할 사람들을 티브이나 신문에서 만난다. 우리는 그들은 증오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이해할 수 없다.&lt;/p&gt;&lt;p&gt;하지만 또한 진정한 선이 있다면 그것도 그 편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왜냐하면 선은 본질적으로 불편부당한 것이니까. 선은 어느 편에도 속해있지 않아야 하니까. 그렇게 치자면 진정한 악도, 선도 어쨌든 ‘비인간적’인 것이다.&lt;/p&gt;&lt;p&gt;그건 내가 국민학교 때의 일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친구 중의 하나는 아직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우리 모두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아이러브 스쿨’이라는 사이트를 통해 동창 모임을 가졌는데, 꽤나 많이 변해있어서 놀랐었다. 연락처를 주고받고 다음에 또 보자고 했을 테지만, 내가 피했는지 아니면 그 친구가 연락을 안했는지, 그 후로 본 기억은 없다. 돌이켜보면 그 친구야말로 내 국민학교 시절의 유일한 친구였다고 할 만한 친구였다. 물론 그일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냥 시간이 많이 흘렀을 뿐이고, 다른 친구도 많이 생겼고, 다른 시간을 보내는데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lt;/p&gt;&lt;p&gt;그랬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들은 서로 다른 편이 되었다.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이. 이편이었다가, 저편이 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게도 편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오래된 이야기같다. 현실적인 이유에서, 이제 나는 그때 내편이었다고 느꼈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이 역시 자연스런 일이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다른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해진다. 아니, 어쩌면 그때처럼, 내가 나도 모르게 욕을 섞으며 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넌 욕을 너무 많이 해.’라고 말하자, 모두들 ‘그래, 그래.’라고 동의했는지도. 그러고보면 항상 그 비슷한 말을 들으며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고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건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lt;/p&gt;&lt;/p&gt;</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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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radiofish.tistory.com/564#entry564comment</comments>
      <pubDate>Wed, 25 Nov 2009 15:18:2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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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포털의 헤드라인 뉴스를 읽고</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25</link>
      <description>&lt;!--StartFragment--&gt;
&lt;P class=바탕글&gt;특별히 시사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닌데 - 아니, 관심이 없는데, 노트북을 켜면 또 아무 생각없이 포털 사이트의 뉴스를 읽고는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뉴스란 게 확실히 뉴스여서 뭐가 맞다든지 틀리다든지, 또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하는 일종의 ‘문제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럼 또 나도 그런 걸 생각하게 된다. 대개 뉴스란 게 그렇듯 - 그러니까 또 뉴스란 게 확실히 뉴스여서 - 뭐가 잘 되고 있다는 얘기보다 잘못 되고 있다는 내용이 많다. 가령 오늘의 (포털) 헤드라인 뉴스는, 자세한 사건의 전개를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촛불집회 재판에서 대법관이 일종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개입을 했다는 내용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정의의 마지막 보루가 권력의 시녀로”&lt;/P&gt;
&lt;P class=바탕글&gt;“신뢰에 금간 대법원…사법파동 또 오나”&lt;/P&gt;
&lt;P class=바탕글&gt;“대법원장·헌재 거론 ‘촛불 유죄’ 재촉”&lt;/P&gt;
&lt;P class=바탕글&gt;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나? 물론 문제가 된다. 이래선 안되는 거다. 잘못됐다. 그래서 우리는 - 아니, 나는 이 문제가 잘못됐으므로 뭔가 잘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길 바란다. 아마도 이 뉴스를 전하는 쪽도, 또 전달받는 쪽도 ‘실제로 일이 그렇게 진행되었다면’ 그건 분명한 잘못이고, 누군가 벌을 받거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할 거라 예상한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뉴스가 전하는 내용을 100퍼센트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태도는 또 대개 바람직하다. 흔히 영어로 ‘팩트’라는 부분, 그러니까 아무 의견도 더하지 않은, 사실 그대로의 사실이란 부분도, 그것이 결국 하나의 의미있는 말이 된다면, 그래서 그것을 누군가 전하고 전달받는 형태가 된다면, 거기에는 항상 사실 ‘이상’의 것이 포함된다. 설혹 거기에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스스로 믿는다해도. (아무런 의도가 없다면, 말이 어떻게 성립되겠는가?) &lt;/P&gt;
&lt;P class=바탕글&gt;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일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을 거라고’, 또 어떤 면에서는 일이 그렇게 진행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믿는다. 일종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 또는 어떤 기관이, 또 어떤 (객관적인) 위원회가 사건의 전모를 밝혀주길 기대한다. (그래서 위의 사건이 다른 것보다 더 큰 중대성을 가지기도 한다. ‘사법부’란 게 그런 역할을 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한편으로 그 중대성을 그렇게까지 과장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사법부’든 무엇이든, 어느 것이나 결국 ‘시대’에 잡혀있는 존재여서,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는 점도 명백하지 않은가? 대체 사법부가 무엇을 밝혀낼 수 있겠는가? 가령 용산참사같은 사건들. 그 일의 전모는 이제 모두 밝혀졌는가? 그래서 또 어떤 사람들은 설혹 지금 사건의 진실이 모두 밝혀지지 않는다해도, 시간을 초월하는 일종의 역사라는 객관성이 ‘최종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거라고 믿는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이렇게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 또 언젠가는 최종적인 진실에 이르게 될 거라는 생각.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물론 문제가 된다. 이런 문제성은 어떤 면에서는 다분히 종교적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실제로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가? 글쎄, 그렇게 보자면, 이건 문제가 안될지도 모른다. 종교적인 부분으로 넘어가게 되면, 문제 자체가 이미 사태의 핵심을 이루는 형식이 되니까 말이다. 문제를 해결하면(그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으면), 거기에는 아무 내용이 없어지게 된다. 내용이 없어지는 걸, 해결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거기에는 ‘해결’이라는 내용조차도 없으니까.&lt;/P&gt;
&lt;P class=바탕글&gt;그런데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생각하겠는가? 얼마나? 내가 보기에는 거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거의 위의 헤드라인과 기사를 읽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어지기도 한다. 사실 나도 뭐 별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이 말은 ‘실제로 일이 그렇게 진행되었다고 해도’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겠는가 생각한다는 뜻이다. 또 반대로 ‘실제로 일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한들’, 또 거기에 무슨 중대성이 있겠는가, 라는 것이다. 이런 걸 냉소주의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지만.&lt;/P&gt;
&lt;P class=바탕글&gt;하지만 이게 문제가 되나? 물론 냉소주의는 문제가 된다. 냉소주의가 문제가 되는 지점은, 그것이 무언가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아주 많은 걸 생산한다. 차갑게 웃음짓는 것만큼 많은 걸 생산하는 다른 표정이 무엇이 있겠는가? &lt;/P&gt;
&lt;P class=바탕글&gt;하지만 위의 기사를 읽고 실제로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생각이 있다. 이 생각은 비록 이 글의 마지막에 위치하게 되지만, 결코 최종적인 생각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생각이 첫 번째 생각이다. 그건, 위의 기사를 읽고, ‘실제로 일이 그렇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법부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게 잘 하는 거고, 그게 정의다. 마땅히 대법원장이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인가? 이것이 예외적인, 또 어떤 의미에서는 병적인 생각인가? 하지만 나는 분명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믿고 싶어진다.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더 밝혀져야 할 진실도 없고, 바꿔야 할 잘못도 없다. 냉소조차도 없다. 드러난 것이 전부고, 그것이 진실이고, 그것이 마땅한 일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가? 얼마나? 나는 거의 전부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이 세상에 문제가 있는가?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그걸 문제라는 것으로 치워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을 아직, 또는 여기서는 ‘해결’되지 않은 것으로 미뤄두는 것과 같다. 냉소주의는 여기서 발생한다. 냉소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태도에 있지 않다. 지금, 이곳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자는 적극적인 태도에 있지 않다. 냉소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그것을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런 생각이 문제가 되는가? 물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뉴스조차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때, 전혀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세상에 문제가 없는 것은, 이 세상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위의 기사를 읽고, ‘실제로 일이 그렇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다. &lt;/P&gt;</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category>냉소주의</category>
      <category>문제성</category>
      <category>사법부</category>
      <category>포털</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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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6 Mar 2009 09:56:5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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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물고기통신 200</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523</link>
      <description>&lt;p class=&quot;바탕글&quot;&gt;어쨌든 이로써 제 소설도 끝이 났습니다. 거의 반 년이상, 붙잡고 있었는데, 단지 끝이 났다는 것만으로도 참 다행스런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반 년이라고 했지만, 정작 컴퓨터 앞에서, 실제 문장을 쓴 시간은 그보다 훨씬 짧아지겠죠. 이를테면 거의 한 달 내내, 원고지를 기준으로 해도 채 10매를 쓰지 못한 시기도 있었고, 또 어떤 한달 내내 쓴 많은 분량의 문장을 그대로 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몇 주간은 아예 문장을 쓰지 못한 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와 반대로 단 며칠 만에 원고지 250매 정도의 분량을 미친 듯이 쓴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끝이 났습니다. 소설이 긴 만큼, 또 붙들고 있던 시간이 긴 만큼, 이 소설에 대해 할 말도 참 많습니다만, 이제 생각하면 다 쓸데없는 말들이란 생각도 듭니다. 워낙 말이 많은 사람인지라, 결국에는 누구라도 붙잡고 술을 마시면서 그 말들을 다 할 거란 생각도 듭니다만, 글쎄요, 그러려면 일단 그 상대방이 이 소설을 다 읽어야 하는데, 그것도 어려운 일이겠죠.&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블로그 형태로 홈페이지를 바꾸면서, 일일 방문객이 표시되기 시작했습니다. 전번에도 이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적을 때는 열 댓명에서, 많을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숫자가 찍히기도 합니다. 전체적으로봐서, 상당한 숫자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굉장히 궁금합니다. 대체 누가 별 볼 것도 없는 이 블로그를 찾는 걸까? 그들은, 매일 같은 사람들일까?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일까? 지금 연재되는 소설을 읽는 걸까? 근데 왜 아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거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합니다. 또 갑자기 방문객 숫자가 줄어들면, 그게 또 궁금해집니다. 왜 줄었을까? 소설이 재미없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제가 그다지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일단 연재된 소설은 비공개로 바꾸었습니다. 또, 1장이 상당부분 수정되었고, 전체적으로 오타나 비문, 틀린 맞춤법도 많았습니다. 이런 저런 부분들을 수정하고, 정리해서 조만간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또 한 살을 먹고, 계속 나이만 먹습니다. 그래도 저는 대체로 잘 지내는 듯합니다. 약 4개월 전부터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게 참 재밌습니다. 제 하루 일정 중에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만일 수영이 아니었다면, 거의 ‘은둔형 외톨이’ 같은 생활이었겠죠. 마찬가지로 소설이 없었다면, 저는 훨씬 더 외로웠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원래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을 쓰면서는 이상하게 대화 부분에서, 키보드를 치면서 동시에 입으로 말을 하게 되더군요. 그게 소설에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니, 장기적으로봐서는 그게 더 나쁠지도 모르죠. 그게 어쩌면 ‘은둔형 외톨이’로 들어가는 첫 길목일지도 모르겠네요. 만일 그렇다면, 모든 뛰어난 소설가들은 ‘은둔형 외톨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만일 주변에 소설을 쓰는 친구가 있다면, 또는 프로 소설가들을 아신다면, 설혹 그들이 비정상적인 행동이나 실수를 하게 되더라도, 그러려니 해주십시오.&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그렇게 소설을 쓰는 작업은 참 이상합니다. 일종의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물론 세상에는 정상적인 소설가도 많을 겁니다. 더 많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아마도 그들이 굉장히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그런 게 없으니, 그런 비정상적인 상황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꼼꼼이 연재를 따라 오신 분이라면 알겠지만, 최종 분량이 2008년의 마지막 날에 올라갔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부분도 있지만, 나름 제게는 그게 큰 의미가 되었습니다. 다른 누군가에게도 그게 작으나마 어떤 의미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어떤 경로로,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서 들어오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방문객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리고 항상 건강하십시오. 건강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lt;/p&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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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3 Jan 2009 22:45:3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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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블로그폰트변경</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notice/515</link>
      <description>&lt;p&gt;저를 개인적으로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이런 사소한 일에 열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금방, 식어버리곤 하는데요.&lt;/p&gt;&lt;p&gt;지금껏, 이 블로그의 기본폰트는 &lt;font&gt;&lt;span style=&quot;color: rgb(153, 204, 102);&quot;&gt;'우리바탕'&lt;/span&gt;&lt;/font&gt;이라는 웹폰트였습니다. 돈을 주고 구입한 거죠. 당시에는 꽤 좋아보였죠. 적어도 그냥 '굴림체'보다는 나았습니다. 그런데 이 폰트의 문제는 '익스플로러'에서는 보이지만, 다른 웹브라우저 '파이어폭스','사파리','크롬','오페라' 등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사실 제 블로그를 방문하시는 분들이 굳이 '익스플로러'를 제외한 기타의 웹브라우저를 쓰시리라 생각치는 않지만, 괜히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던 것도 사실입니다.&lt;/p&gt;&lt;p&gt;그러다 최근에 네이버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나눔고딕'이라는 폰트를 발견했습니다.&lt;/p&gt;&lt;p&gt;그래서 이제 이 블로그의 기본폰트는 &lt;span style=&quot;&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153, 204, 102);&quot;&gt;'나눔고딕'&lt;/span&gt;&lt;/span&gt;이 되었습니다. 순서를 적어보자면 '나눔고딕','우리바탕','맑은고딕', '굴림체' 순입니다. 만일 이 블로그의 폰트가 '굴림체'로 보이신다면 제가 원하지 않는 가장 마지막 폰트로 보고 계신 셈이지요.&lt;/p&gt;&lt;p&gt;'우리바탕'은 웹폰트라서 따로 설치하실 필요가 없지만 '나눔고딕'은 개인적으로 자기 컴퓨터에 설치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힘들거나 복잡하지는 않고,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통해, '다운로드' 후 클릭 한번이면 간단하게 설치가 됩니다. 컴퓨터에 크게 위해를 끼치지도 않습니다. 삭제도 간단하니까 안심하십시오.&lt;/p&gt;&lt;p&gt;아래의 안내링크를 따라 가서, 설치하셔도 되고, 아래 첨부파일을 다운로드 받으신 후 설치하셔도 됩니다.&lt;/p&gt;&lt;p&gt;&lt;strong&gt;&lt;font&gt;&lt;span style=&quot;&quot;&gt;&lt;a href=&quot;http://hangeul.naver.com/index.nhn?goto=fonts&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normal;&quot;&gt;&lt;span style=&quot;&quot;&gt;&lt;span style=&quot;&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255, 153, 0);&quot;&gt;안내링크&lt;/span&gt;&lt;/span&gt;&lt;/span&gt;&lt;/span&gt;&lt;/a&gt;&lt;/span&gt;&lt;/font&gt;&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lt;font color=&quot;#ff3399&quot;&gt;&lt;span style=&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normal;&quot;&gt;&lt;span style=&quot;&quot;&gt;&lt;span style=&quot;&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255, 153, 0);&quot;&gt;첨부파일&lt;/span&gt;&lt;/span&gt;&lt;/span&gt;&lt;/span&gt;&lt;/span&gt;&lt;br&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a href=&quot;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360A7354FBB25512C&quot;&gt;&lt;img alt=&quot;&quot; src=&quot;https://i1.daumcdn.net/cfs.tistory/v/0/blog/image/extension/exe.gif&quot; style=&quot;vertical-align: middle;&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gt;invalid-file&lt;/a&gt;&lt;/div&gt;
&lt;/font&gt;&lt;/strong&gt;&lt;/p&gt;&lt;br&gt;</description>
      <author>물고기군</author>
      <guid isPermaLink="true">https://radiofish.tistory.com/notice/515</guid>
      <pubDate>Wed, 17 Dec 2008 07:00:00 +0900</pubDate>
    </item>
    <item>
      <title>물고기통신 117</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482</link>
      <description>&lt;!--StartFragment--&gt;
&lt;P class=바탕글&gt;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걸 믿을 수 있어? 마치 투명한 물에 한 방울의 파란 잉크가 떨어지듯이. 처음에는 아주 조그마한 변화인 것처럼 느끼지. 그건 그저 한 방울의 잉크고 뭐라 할 것도 없이 양적으로 물이 훨씬 더 많으니까. 게다가 지금껏 그것은 ‘꽤 오랫동안’ 투명한 채였던걸. 하지만 그 변화를 바라보면서, 또 때로는 저항하기도 하면서, 몸을 흔들면서 내쫓으려고 하면서, 사실은 그 모든 행동들이 오히려 잉크를 도와주고 있다는 걸 모르지.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한 방울의 잉크가 투명한 물을 파랗게 만드는 것은 순식간이지만, 그것을 이전처럼 돌려놓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야.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물에서 한 방울의 잉크를 뽑아내는 일이. 요컨대 ‘에너지’가 필요한 거야. 변화를 되돌리기에는, 알겠어? 바깥의 누군가(무언가)의 도움이 필요한 거야. 이것은 뭐랄까, 일종의 물리학이지만, 그다지 어려운 개념은 아니야. 왜냐하면 바로 지금, 너 말이야, 너한테도 그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심지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순간에도 그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음이, 한 방울의 잉크가 되는 거야. &lt;BR&gt;&lt;BR&gt;이쯤에서 너는 눈치 챘을지도 몰라. 우리는 때로 물속에 사는 한 마리의 물고기인 것처럼 그 모든 변화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이 바로 그 한 방울의 잉크인 거야. 너는 이 말을 우리 자신이 이 세계를 망치거나 구원하는 하나의 원인이라고, 마치 썩은 물고기가 우물을 오염시키듯이,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물론 그런 건 아니야. 잘 생각해야 돼. 너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바로 너한테 지금 일어나고 일들에 대해서. 나는 그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무엇이 잉크고, 무엇이 물이고, 무엇이 물고기인지.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어떻게 한 방울의 잉크가 갑자기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lt;/P&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category>변화</category>
      <category>잉크</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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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radiofish.tistory.com/482#entry482comment</comments>
      <pubDate>Fri, 26 Sep 2008 15:28:39 +0900</pubDate>
    </item>
    <item>
      <title>물고기통신 116 - 수영 호흡법</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481</link>
      <description>&lt;!--StartFragmen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여전히 나는 물이 무섭다. 수영이 싫다는 건 아니다. 수영장 가는 건 즐겁다. 그래도 역시 물속으로 얼굴을 담글 때마다, 그리고 반대편 풀사이드까지 간신히 가서 뒤돌아 섰을 때, 다시 가야 될 25미터의 풀을 볼 때마다 내가 물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겠다. 간단하게 말해서 내가 공기 중에 있을 때 나는 1분이고, 길게는 1분 30초나 2분까지도 숨을 참을 수 있다는 걸 안다. 실제로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물속에서는 30초도 있지 못하겠다. 몸이 뇌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물밖으로 나가라, 숨을 쉬어라.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항상 이런 식이다. 25미터 풀을 몇 미터 남겨놓고 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중간에 멈출 때도 있지만, 그걸 참고 끝까지 갈 때도 있다.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고통스런 기억이 된다. 물밖으로 나가도 숨 쉴 수 없는 물속이 내게 준 고통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다. 숨 쉴 수 없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숨 쉴 수 없는 고통이다. 아직 나는 수영 호흡법이 익숙하지 못하다. 그리고 가만히 발을 바닥에 딛고 서서, 내 앞에 펼쳐진 25미터의 물을 바라본다. 물론 나는 안전하다. 풀의 깊이는 1미터 50센치도 되지 않는다. 근데도 정말 무섭다. 그만 두고 싶다. 왜 내가 다시 물속으로 얼굴을 집어넣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대체 30초도 숨을 못참는다는 게 말이 되나? 그게 연습으로 해결되겠어?&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다음날이 되면, 아니 물밖으로 나와 수영장이 있는 건물을 나설 때면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 자신이 강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다. 반대로 너무나 약해서, 고작 물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고통 그 자체를 즐기는지도 모른다.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이런 걸 뭐라고 할까? 물을 무서워하면서도 수영을 좋아하는 게 가능할까? 수영이란 내가 보기에 기술이나 영법, 혹은 단순히 이곳에서 저곳까지 헤엄친다는 건 아닌 것 갈다. 그리고 물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때로 수영이란, 우리가 항상 있는 이곳이 아닌,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지상이 아닌 곳에서, 우리의 몸이 어떻게 적응하는가를 발견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게 단순한 고통으로 그치지 않는 것은, 결국에는 ‘내’가 아니라 나의 몸이 무언가를 배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로 그렇다. 나는 거의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내가 알게 되는 것은, 고통이라든지, 또 30초도 견디지 못한다는 씁쓸한 자기 부정뿐이다. 그러나 나의 몸은, 나와는 상관없이, 조금씩 괜찮아진다고 느끼는지도 모른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해볼만 한데, 이봐, 다시 얼굴을 물속에 쳐넣어, 한 번 해보자고. &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정신보다 신체가 강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아마도, 그럴 지도 몰라. 때로 신체는 아주 순수한 의미에서 죽음을 바라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반대로 죽음 그 자체가 신체를 아주 건강하게 살아있게 만드는 지도. 물속에 얼굴을 넣을 때마다 내가 만나는 것은, 나의 신체인지도 모른다. &lt;/p&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category>수영</category>
      <category>수영장</category>
      <category>신체</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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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radiofish.tistory.com/481#entry481comment</comments>
      <pubDate>Fri, 19 Sep 2008 23:46:52 +0900</pubDate>
    </item>
    <item>
      <title>수영 강습</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231</link>
      <description>&lt;!--StartFragment--&gt;
&lt;P class=바탕글&gt;초등학교 때 수영을 배웠다. 우리 때는 국민학교라고 했는데, 이 워드 프로그램에선 국민학교라고 쓰면 자꾸 초등학교라고 자동으로 바뀐다. 아무튼, 정확히 몇 학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또 수영을 배우는 걸 내가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적지 않은 기간 수영을 배웠고, 나중에 친구들과 수영장 같은 델 가면 제법 잘하는 축에 속했다. 이상하게도 수영을 배우는 동안에 나는 특별히 친구가 없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학교나 동네친구와 함께 배우러 다닌 게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고 겉돌았다는 건 아닌데, 전혀 나와 어울렸던 또래의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 없다. 대신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어떤 형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는데, 뭐랄까 좀 잰 체하는 녀석이었다. 가슴팍도 넓고 몸매도 날렵했다. 그걸 재는 듯한 분위기였다. 왜 우리와 함께 수영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수영도 꽤 잘했는데 말이다. 수영장은 국민학생이 일상적으로 왔다갔다하기에는 꽤 멀었다. 지금도 나는 그곳이 어딘지 알고 있는데, 가늠해보면 버스로 세 정거장이나 네 정거장을 가야 했다. 버스에서 내리고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셔틀버스 같은 게 있었나? 자꾸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다닌 것치고는 그 일에 대한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분명 매일은 아니었다 해도 일주일에 세 번씩, 최소 두 달에서 석 달을 다녔을 텐데 말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수영강습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 날이 어두워져 있다. 아마도 강습을 받기 시작한 처음 얼마간은 밝았을 것이다. 이런 기억이 있다. 날이 아직 환한 데 나는 그곳에서, 소위 말하는 ‘삥’을 뜯긴 적도 있다. 뒤져서 나오면 십 원에 한 대씩 이런 얘기 말이다. 꽤 무섭고 나중에는 서러워져서 혼자 수영장을 보낸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다. 분명 국민학생이 혼자 다니기에는 너무나 멀고, 으슥하고, 게다가 나중에는 어두워지기까지 했다. (아마도 아직 그 동네는, 그리고 내가 다닌 수영장이 있던 빌딩은 여전히 그럴 것이다. 나중에 근처를 지나면서 나는 그곳이 거의 변하지 않은 걸 발견했다.)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혼자 그곳을 왔다갔다했다. 친구도 없고, 잘난 척하는 이상한 형이 있고, 삥뜯는 깡패도 있고, 그렇다고 수영을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lt;/P&gt;
&lt;P class=바탕글&gt;하루하루 날이 어두워지는 거, 어제와 같은 시간인데, 세상이 전혀 달라진 것처럼 보이는 거, 그 미묘한 변화에 대해서 나는 수영장을 다니면서 잘 알게 된 것 같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내게 쓸쓸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반대로 쓸쓸함이란 단어에 대해 배운 것 같다. 물론 그전에도 아무리 어렸다 해도 쓸쓸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게 뭔지 몰랐겠지.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겠지. 그것은 별로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심지어 싫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수영장이 있는 건물 앞 현관에서 별로 친하지는 않지만, 말을 섞는 아이들과 헤어지고 혼자 어두워진 거리로 나와 집까지 먼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인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가을이 끼어 있었고, 바로 이 계절이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어스름한 시간, 하나의 계절이 다른 계절로 바뀌는 며칠간. 때로 쓸쓸함을 느끼는 건 무언가를 잃어버리거나, 내 주변의 어떤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마치 한순간에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투명해지다가 어느 순간, 그러니까 그것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말할 만한 순간, 이미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깨닫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요점은 그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lt;/P&gt;
&lt;br /&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오늘, 그때로부터 몇십 년이 지나서 다시 수영강습을 받았다. (중간에 대학교 1학년 때 교양체육으로 수영을 배운 적이 있긴 하다.)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는 서른여섯 살의 아저씨가 되었다. 다시 킥판을 잡고 물장구를 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숨을 잘 쉴 수가 없다. 어쩌면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만큼 나는 수영을 잘하지 못하는지 몰랐다. 자전거타기처럼 무엇이든 어렸을 때 배운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금방 잘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반대편 풀을 향해 가다가 중간에서 자꾸만 멈추게 된다. 분명 어렸을 때는, 아니 대학 1학년 때만 해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25미터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결국 강사에게 숨을 잘 쉴 수 없다고 말했다. 강사는 몇 번 내 자세를 고쳐주더니 그래도 잘되지 않자, 아마도 물이 무서워서 그럴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표현은 달라지만 그런 뜻이었다. 그러니까 물속에서 너무 숨을 많이 뱉으니까, 물 밖에서 숨을 더 많이 들이셔야 한다는 것이다. 자꾸만 숨을 쉬려고 하니까, 숨을 못 쉬는 거라고. 그게 내가 숨을 잘 못 쉬는 이유 전부는 아닐지 몰라도, 내가 물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올바른 지적이었다. 강사의 말을 들으니까 내가 그랬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숨을 너무 많이 뱉었다는 것을 알았다. 많이 뱉으면 많이 들이셔야 하는데, 그런 단순한 사실을 물속에서 잊었다. 두려워서, 어쨌든 거긴 물속이니까. &lt;/P&gt;
&lt;P class=바탕글&gt;수영강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자꾸 이상해졌다.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나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그게 쓸쓸함이란 걸 알았다. 바보, 숨도 잘 못 쉬네. 그러면서 수영을 잘한다고 막연히 생각했었지. 나는 수영을 잘하는 어린 시절의 나를 잃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수영을 잘하는 나 자신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것이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그게 고통스럽지는 않다. 어쨌든 오늘은 첫날이고, 나는 다시 킥판을 잡았으니까. 깡패에게 삥을 뜯기던 초등학생의 내가 서른여섯 살의 아저씨가 돼서, 물을 무서워하면서도. 그리고 확실히 그때와 비교하면 집은 훨씬 가까웠다. 그러니까 괜찮다. &lt;/P&gt;</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category>계절</category>
      <category>수영</category>
      <category>수영강습</category>
      <category>어스름</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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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 Sep 2008 23:14:56 +0900</pubDate>
    </item>
    <item>
      <title>물고기통신 115 - 두 달은 공짜</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480</link>
      <description>&lt;p&gt;석 달치를 끊으면, 두 달은 공짜라는 말에 다섯 달을 헬스를 다니게 되었다. 등록하고 얼마 후 여자 트레이너가 기구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이제 이번 달로 다섯 달이 끝나게 된다. 얼마 전에, 그러니까 약 넉 달이 지난 즈음에, 열심히 기구를 들고 있던 내게 트레이너가 다가왔다. 처음에 나를 가르쳤던 트레이너였다. 잘하시는데요, 라는 말로 시작해서 내 자세를 교정해준다. 처음처럼 자세는 쉽지 않다. 그녀가 떠나고서 무게를 낮춰서 교정된 자세로 몇 번 들어본다. 그것은 이제껏 넉달 동안 내가 열심히 했던 자세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며칠 뒤 나는 내가 넉 달 동안 전혀 쓸모없는 근육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그 때문에 어깨가 아팠다는 것도 알았다. 제법 자세가 나왔고, 놀랍게도 거울에 비쳐 보니, 꼭 자세를 바꾸었기 때문은 아니라 해도, 근육의 형태가 드러났다. 대체 왜 그것을 이제야 알려줬는지, 넉 달동안 나는 분명히 그녀가 보는 앞에서 운동했다. 이제 슬슬 이용기간이 끝나가니까 알려준 것 같아, 얄팍한 상술이 이런 건가 싶었다. &lt;br /&gt;
그런데 문득 나한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 도움도 필요치 않아요, 귀찮게 뭘 알려주려고 하지 마세요, 라는 표정으로 운동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내 곁에 다가오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고, 되도록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인가 아닌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종의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서, 옳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을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원칙적인 측면에서는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니 각론적인 측면에서는 확실히 틀린 것 같다. 그러니까 선배나 고수의 도움이란 것은 대개, 확실한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얄팍한 상술이니, 잘난 체니, 무슨 의도가 있느니 하는 식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설혹 그런 것이라 해도, 어쨌든 근육만 잘 나오면 되는 게 아닌가. &lt;br /&gt;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당장 나 자신의 기본적인 태도를 바꾸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었다. 이제 이용기간이 한 달도 남지 않은 것이다. &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guid isPermaLink="true">https://radiofish.tistory.com/480</guid>
      <comments>https://radiofish.tistory.com/480#entry480comment</comments>
      <pubDate>Fri, 8 Aug 2008 23:42:21 +0900</pubDate>
    </item>
    <item>
      <title>그래서 상상이 언제나 이긴다 -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230</link>
      <description>&lt;!--StartFragment--&gt;
&lt;P class=바탕글&gt;사람들은 누군가 나쁜 선택을 했을 때, 그가 뭘 잘 몰라서 그랬다고 말한다. 이 말은 대개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맞는 건 아니다. 그리고 전부 맞는 것도 아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 즉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같은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 대해 평가를 내릴 때마다, 그 평가의 절반은 나 자신에게 향한다.&lt;/P&gt;
&lt;P class=바탕글&gt;물론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뭔가가 두려워서 그랬다면, 여전히 뭔가를 잘 모르고 있는게 아닌가 라고 의심해볼 수 있다. 마치 자연재해를 신의 뜻으로 여겼던 조상들처럼. 기우제를 지내거나 제물을 바치는 행위가, 뭘 잘 몰라서 그랬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이 왜 발생했는지를 아는 것이, 그 일에 대한 두려움의 전부를 없애주지는 못한다. 실제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 그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원인을 영원히 없애버릴 수 없다면. 게다가 우리가 뭘 안다고 말하기 위해서, 그 원인들을 끝없이 추적했을 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마지막에 만나는 것은 ‘근본적인 무지’다. 근본적인 무지는 무엇인가? 이것을 표현하는 여러 방식들이 있다. 하지만 가장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 무지는,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무지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알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지는 그렇게 ‘어떤 존재’에 대한 부정과 같다. 무지는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지만, 그것이 실제로 ‘실현’되지 않는다고, 실현된 적이 없다고 믿는 것과 같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무지를 이렇게 정의 내리고 나면,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설명하는 다른 방식을 얻게 된다. 이를테면 그들은 잘 알고 있지만, 근본적인 무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쁜 선택을 한다. 이때의 근본적인 무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이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무지이다. 자신이 선택의 바깥에 있다고 믿는 무지이다. 실제로 자신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고 믿는 무지이다. 반대로 자신이 무엇도 언제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무지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자신의 선택의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더해서 그들은 그 결과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다만 그들이 모르는 것은 자신들이 선택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그들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하지만 그들 자신은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실현되지 않음’이 근본적인 무지를 낳는다. 이것은 도박이나 사기의 경우로 쉽게 설명된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은, 사기를 치는 사람들에게 속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속는 것은 ‘사기’ 그 자체다. 만약 누군가 돈 1억을 투자하면 한 달 뒤에 10억을 되돌려 받는다는 사기를 당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일이 불가능한가? 그 일이 단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던 일일까? 아니다. 그런 일은 실제로 존재한다. 돈 1억이 한 달 만에 10억이 된다. 그보다 더한 일도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부자란 존재들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어떤 것이 사기가 아니라, 실제로 모든 일이 사기다. 돈. 화폐.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모르는 걸까? &lt;/P&gt;
&lt;P class=바탕글&gt;‘라운더스’라는 도박영화를 보면 만일 네가 테이블에 앉아 30분 내에 ‘봉’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네 자신이 봉이다, 라는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문제는 만일 이 세상이 테이블이라면, 누가 그 테이블에서 일어설 수 있겠는가 이다. 테이블을 벗어나는 것이 과연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은 선택이 될 수 없다. 아무도 그것을 선택할 수 없다. 다만 그렇게 될 뿐이다. 난간을 넘어 허공을 향해 발을 내딛는 것이다.&lt;/P&gt;
&lt;P class=바탕글&gt;‘실현되지 않음’이 낳는 근본적인 무지는, 그러니까 그 일이 언제나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이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진실로 존재하게 된다. 아무도 선택할 수 없지만, 모두가 선택의 결과가 된다는 말이 이것이다. 이때,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하지만, 그리고 어쩌면 모두가 그렇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채 남아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은 진신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무지를 향해 있다. 지식은 이 근본적인 무지를 덮는 뚜껑일 분이다. 지식이야 말로 뭘 잘 모르고 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결론적으로 만일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진실로 존재한다면, 그 반대로, ‘잘 알고서 좋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만일 무언가가 정말로 이 세상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 알고서 좋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잘 알아서 좋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근본적인 무지와, 상상(이 말은 항상 핵심적인데)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상상이 이긴다. 왜냐하면 상상은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기 때문인데, 누구도 실현된 적이 없는 것, 심지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에 대항해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사실은, 상상은 그렇게 실현되지 않음으로, 항상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상상이 이긴다. &lt;/P&gt;</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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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 Aug 2008 16:13:54 +0900</pubDate>
    </item>
    <item>
      <title>상상에 대해서</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229</link>
      <description>&lt;!--StartFragment--&gt;
&lt;P class=바탕글&gt;흔히 말하기를 상상력은 무한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실과 상상 중에 어떤 것이 더 클까? 즉각적으로 대답하자면 당연히 상상이 더 크다. 왜냐하면 상상은 무한하니까. 어쨌든 현실은 유한하니까. 그런데 나는 최근에 어떤 사례가 떠올랐다. 이 사례가 현실과 상상에 대한, 또 그 크기에 대한 정면의 대답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저 이런 '측면'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그러니까 예를 들면 말이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섹스를 할 수 있다. 이건 비유적인 얘기가 아니라, 실제적인 행위 - 자위행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실제의 섹스행위보다 자위행위의 경험이 더 많을 것이다. 이것은 비유적인 의미까지 포함할 수 있다. 그러니까 순전한 상상 같은 거 말이다. 우리가 티브이나 매체를 통해 바라보고 상상하는 어떤 성적인 유사행위들, 상상들 말이다. 또는 과거의 여자라든지, 심지어는 아주 치명적인 대상에 대한 상상까지도. 그것을 통해서 일종의 유사 자위행위를 행할 수 있다. 이렇게 치면 분명 실제의 섹스행위보다 상상적인 자위행위가 더 많고, 크다고 볼 수 있다. 상상이 현실보다 큰 것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그런데 우리는 실제의 섹스행위를 통해서도 상상을 할 수 있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상상을 하고 있지 않는가? 가령 우리는 구체적인 한 여자나 남자와 섹스를 하면서, 다른 여자나 남자를 상상할 수 있다. 그건 도덕이나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현실적인 문제다. 누가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섹스가 무엇으로 구성되느냐의 문제다. 지금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지만, 다른 여자를 상상하면서 섹스할 수 있다. 티브이나 매체에서 우리를 상상하게끔 유혹하는 섹스의 다른 대상 등을 상상할 수 있다. 그걸 흔히 섹스심볼이라든지, 섹스어필이라든지 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이것은 섹스에 있어서 예외적인 상상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상상이 필요하지 않은 섹스도 가능할 것이다. 그저 이 사람과 행위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성적으로 고양되고 충만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엄밀한 의미에서 상상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것일까?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또 그의 몸을 보면서, 거기에 아무 것도 끼어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어쨌든 만일 실제 섹스행위에서도 어느 정도 상상이 개입한다고 한다면, 역시 상상이 현실보다 크다. 상상도 상상이고, 현실적인 것도 상상이 개입되어 있다. 그렇다면 상상력이 무한하다는 말은 이제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진실이 되는 걸까? &lt;/P&gt;
&lt;P class=바탕글&gt;그렇지 않다. 우리는 무한히 상상할 수 있다. 우리가 결코 영원히 섹스할 수 없는 대상들까지도 상상 속에서 섹스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결코 상상 속에서 섹스할 수 없는 대상과 우리는 현실적으로 섹스할 수 있다면? 다르게 말하면 결코 상상하지도 않았던, 또 어떤 의미에서는 상상 속에서는 할 수 없는 대상과의 섹스. 예를 들자면 아주 못생긴 여자, 혹은 남자, 도저히 바라보고 있으면 섹스에 대한 어떤 열정도 불러일으켜지지 않는 상대.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편차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왜 우리가 그런 상대와 섹스를 해야 한단 말인가? 결코 현실뿐만 아니라 상상에서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왜 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 물음의 형식으로 이 질문을 쓰자마자 대답은 너무나 간단한 것이 된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만 하면서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때 어쩌면 섹스가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가에 대한 다른 접근방식을 확보할 수 있다. 이를테면 결코 상상 속에서도 하고 싶지 않았던 대상과의 섹스를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 행위를 어떻게 성공시킬 수 있는가? 그렇지, 그것이 결국 상상이 하는 일이다. 우리가 상상 속에서도 하고 싶지 않았던 대상과의 섹스를 성공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바꿔쳐야 한다. 상상해야 한다.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을, 일종의 비현실로, 상상으로 대체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매일 매일을 성공시킬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항상 패배하고 있으면서도. &lt;/P&gt;
&lt;P class=바탕글&gt;자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상상과 현실 중에 어느 것이 더 클까?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대상과 현실적으로 섹스할 수 있으니까, 이 점에서는 분명 현실이 상상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무한한 상상을 벗어나는 유한한 현실의 사례. 이 시점에서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 상상할 수 없는 대상이란 없다, 그러니까 아주 못생긴 대상과의 섹스도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닌가라고 되물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순진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으니까. 상상할 수 있지만, 우리가 그 대상과 섹스할 수 없다. 말 그대로 그냥 할 수 없는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대상을, 순전히 현실적인 대상을 다른 상상의 대상으로 바꿔쳐야만 그 행위를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다. 현실에서 하고 있는 일을 상상 속에서는 할 수 없다.&lt;/P&gt;
&lt;P class=바탕글&gt;그리고 상상 속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우리가 현실적으로 할 수 없는가? 분명히 나는 그것을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하고 있다. 상상할 뿐인 모든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가? 그 사례는 무수히 많지 않은가? 이를테면 우리가 상상할 뿐인,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모든 섹스의 대상들, 그들이 현실적으로 섹스를 하고 있지 않는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 그 모든 일들이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않는가? 섹스를 하기도 하고, 자살을 하기도 한다. 핵폭탄, 실제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가? 지옥, 그것은 이 세계 어딘가에 있지 않은가? 마치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국이라 부를 어떤 삶을, 그저 상상할 뿐인 어떤 삶을, 누군가는 진짜로 살고 있는 것처럼.&lt;/P&gt;
&lt;P class=바탕글&gt;상상한 것들이 현실적이 될 수 있지만, 우리가 모든 현실을 상상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결코 상상하지 않았던, 상상할 수 없었던 현실적인 일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과연 현실보다 상상이 크다 말할 수 있을까? &lt;/P&gt;
&lt;P class=바탕글&gt;결론은 간단하다. 상상은 현실보다 언제나 작은 것이다. 상상하지 마라. 우리가 결코 상상하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라. 그 일들이 언제나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다. &lt;/P&gt;</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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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4 Jul 2008 21:01:49 +0900</pubDate>
    </item>
    <item>
      <title>우리는 임창정이 아니다.</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227</link>
      <description>&lt;p&gt;나는 배우 임창정을 좋아한다. 개인 임창정은 잘 모르겠다. 그가 출연한 영화중에는 괜찮은 것도 있고, 그저 그런 것도 있고, 왜 만들었는지 모를 영화도 있다. 하지만 가장 나쁜 영화에서조차 배우 임창정의 연기에는 뭔지 모를 울림이 있다. 그가 그만큼 연기를 잘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때로 그건 잘한다 못한다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임창정 본인조차 모를 ‘생득적’인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lt;br /&gt;
&lt;br /&gt;
가령 ‘일번가의 기적’이라는 영화를 보자. 이 영화는 그저 그런 영화일까? 관점에 따라 괜찮은 영화일 수도, 쓰레기 같은 영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현실을 반영한 영화일 수도 있고, 오히려 그것을 감상적으로 어설프게 할리우드식으로 버무려 놓은 영화일 수도 있다. 나는 나름대로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부분도 있지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그런데 이 영화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놀라운 장면은 - 아니, 놀라운 대사는 이 부근에 있다. 장면이나 설정 자체는 구태의연하달 수도 있지만. 철거용역원들이 집들을 부수고 있고 아이들이 울고 있다. 임창정이 등장하고, 아이 중 하나가 그에게 저 사람들이 왜 우리 집을 부수느냐고 하소연한다. 그러자 임창정이 말한다. ‘울지마. 이 새끼야. 그러니까 니들이 맨날 가난한 거야.’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대사였다. 물론 이 다음 대사는 ‘저 아저씨들이 헌집 헐고 새집 지어주려고 한다.’며 착한 거짓말 같은 좀 오버스런 대사가 나오긴 하지만. &lt;br /&gt;
&lt;br /&gt;
앞선 대사가 뭘 의도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저 아저씨들이 왜 우리 집을 부숴요. 그건 네들이 가난하기 때문이야. 나는 이 대사가 아주 놀랍게 느껴진다. 그건 이 대사가 정답을 말하고 있기 때문인데, 동시에 그것이 임창정이라는 배우의 입을 통해 말해지기 때문이다. ‘색즉시공’이나 기타 영화에서 보여지는 바보스럽고 불쌍하고, 그래서 자주 비겁하고 굴욕적이고, 또 때로는 비열한 이미지의 배우. 분명히 다르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또 세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또 이어진 대사처럼 우리들이 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지만 임창정은 아주 쉽고 간단하게 말한다. 네들이 가난해서, 우리가 가난해서. 우리가 가난뱅이이기 때문에. 누가 그 사실을 모르겠는가? 가난하지 않다면 그런 일을 겪지 않겠지. 이를테면 영화 내내 가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그건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들 중 하나가 - 물론 임창정은 그 마을의 주민이 아니지만 짐작할 수 있듯이 역시 가난뱅이인 한 등장인물이 우리가 가난뱅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죄인이라고 말한다. &lt;br /&gt;
&lt;br /&gt;
‘스카우트’라는 영화도 있다. 이 역시 임창정이 아니었다면, 영화가 도달한 어떤 지점까지 이르지 못했을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 역시 여러 관점들이 있을 테고, 여러 평가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부근의 딱 한 장면만은 이론의 여지없이 훌륭하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건 먼 거리에서 임창정이 계엄군에게 붙들리는 장면이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건 임창정이 공중전화 부스에서 선동렬의 아버지와 통화하고 나온 후가 된다. 이 장면의 놀라운 점은 그것이 먼 거리에서 풀샷으로 보여진다는 점에 있는데, 주위가 어둡고 조명이 한 곳에서만 비추고 있기 때문에 배우들의 얼굴은 잘 확인할 수 없다. 그저 정렬하고 있는 군인들이 있고 그 앞에서 혼자 매 맞는 사람이 있다. 별 다른 소리 - 잔혹한 매질소리도 극적인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끌고 간다. 그동안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고정되어 있다. 어쩌면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효과 자체는 이와 다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이걸로 끝이다. 뒤에 에필로그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사실 여기서 끝났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임창정이 출연하지 않는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있다. 만일 영화가 진실만을 보여준다면 ‘화려한 휴가’에 나오는 광주의 어느 곳, 공중전화 부스가 있는 어두운 골목에서 임창정은 끌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해도 어쨌든 임창정은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대신 ‘살인의 추억’의 엘리트형사이면서 세종대왕인 김상경과 일지매인 이준기, 외과의사 봉달희 이요원과 국민배우 안성기가 나온다. 일단 배우들의 면면자체부터 화려하다. 임창정이 끼어들 틈이 없다. 임창정이 나왔더라면 왠지 ‘화려한 휴가’보다는 ‘구질구질한 휴가’쪽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도착한 날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호텔 예약은 되어 있지 않고 지갑은 잊어버리고 여자는 화를 내며 돌아가 버린다. 물론 나는 배우들이나 배우들의 캐스팅에 대해 딴죽을 걸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영 어울리지 않는 캐스팅인데 라고 말하고 싶은 부분도 있지만, 그게 이 영화의 치명적인 부분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계속 ‘아니다’라고 중얼거려야 했다. 무엇보다 감독이나 작가가 드라마(극)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혹은 부족한 부분이 유독 이 영화에 잘 드러난다. 이것은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작법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영화에 치명적인 약점인 것은 분명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아니다.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이 영화가 5.18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스카우트’가 더 멀리 나아갔다. 어쨌든 ‘스카우트’에는 임창정이 나오니까. 이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임창정을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말만은 아니다. &lt;br /&gt;
&lt;br /&gt;
‘화려한 휴가’의 첫장면은 택시기사인 김상경이 키 큰 가로수가 길 양옆으로 늘어선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어있는 시골길을 달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분명 평화로울뿐더러, 아름답기까지 하다. 아름다운 가로수길이다. 이 동화같이 아름다운 마을에 군인들이 들이닥친다. 영화의 전반부는 이 마을만큼이나 아름다운 주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그리고 있다. 교회가 나오고, 하늘거리는 플레어스커트와 긴 생머리의 여자가 나오고, 똑똑하고 착할뿐더러 아름답기까지 한 미소년 고등학생이 나오고, 감초역할을 할 만한 코믹스럽고 구수한 아저씨들도 나오고, 근엄하면서 인정 많은 택시회사 사장도 나온다. 신부님, 착한 형, 학생들을 사랑으로 가르칠 것 같은 선생님. 정말 많이도 나온다. 그래도 임창정은 안 나온다. 그리고 5월 18일이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역사적 사건과 시간순서에 충실해진다. 거기에 극적인 효과가 몇 가지 덧붙여질 뿐이다. 착한 미소년 동생의 죽음이라든지, 시민군이 된 퇴역군인과 계엄군이 된 정의로운 현역군인과의 만남이라든지, 순박한 택시기사 총각과 아름다운 생머리 간호사 처녀의 애틋한 사랑, 딸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하는 아버지. 나올 법한 모든 극적 효과를 위한 관계들이 등장한다. 5월 21일 낮 시위대를 향한 계엄군의 발포. 5월 22일 시민들 무장, 공수부대 퇴각. 그리고 마침내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 계엄군 투입, 남아있던 시민군 대부분 사살. 영화는 이 부근에서 끝이 난다. 착한 형이자 택시기사인 김상경의 죽음과 이요원의 애절한 차량방송 목소리로. 아니, 에필로그적인 장면이 덧붙여진다. 김상경과 이요원 결혼식 환상 장면. (이런 장면이 나오는 영화가 너무 많아서 나는 때로 원조가 어느 영화인지 궁금해진다.)&lt;br /&gt;
&lt;br /&gt;
영화에는 정말로 많은 극적인 장면들이 나오는데 따져보면 실제 사건이 워낙 그러했기 때문에 영화가 그것에 압도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물론 압도되어선 곤란한 일이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마지막 장면, 주인공 김상경의 죽음 장면이다. 이것을 영화 ‘스카우트’와 비교할 수 있다. 차이점은 여러 가지지만 어쨌든 ‘화려한 휴가’가 더 화려하다. 김상경의 절절한 대사도 있고, 얼굴 클로즈업도 있고, 슬로우 모션도 있다. 게다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장면도 화려하다. ‘스카우트’는 앞서 말했듯이 아무 것도 없다. 임창정은 반항하지 않는다. 대사도 없다. 있다 해도 그저 웅얼거림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냥 공중전화 부스에서 끌려나와 개처럼 맞고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끌려갈 뿐이다. &lt;br /&gt;
&lt;br /&gt;
아마도 ‘화려한 휴가’에 임창정이 나왔다면 그리고 그가 김상경과 똑같은 처지에 있었더라면 그는 총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폭도는 총을 버려라. 예. 버렸어요. 그러니 죽이지 말아요. 5월 18일 날 계엄군들이 왜 자신들을 때리는지 아무도 모를 때, ‘일번가의 기적’의 그 아이처럼 누군가 임창정에게 왜 저들은 우리를 때릴까요? 라고 묻는다면 임창정은 우리가 폭도니까. 그래서 맨날 맞고 다니는 거야, 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lt;br /&gt;
&lt;br /&gt;
김상경의 마지막 대사는 ‘나는 폭도가 아니야.’였다. 그에 화답하듯이 이요원의 방송은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즉각적으로는 ‘우리가 폭도가 아니었음을 기억해주세요.’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lt;br /&gt;
그렇다면 그들은 폭도가 아니라, 무엇이었을까?&lt;br /&gt;
영화는 그들이 그저 평범한 시민들이었음을 강변하고 있는 듯하다. 평범할 뿐만 아니라, 착하고 순수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시민들. 똑똑하고 정의롭고 인정 많고 의리 있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래, 그들은 시민들이었어. 당시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언론들이 매도했던 폭도가 아니었어. 그들이 무장하고 저항했던 외양은 마치 국가에 대항하는 폭도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원인이 국가의 무법적인 폭력에 있으니 그것은 당연한 자위권의 발동이었어.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린다면 5.18은 무고한 시민들을 살해한 국가권력의 만행에 방점이 찍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사실이니까, 단지 그렇다고 말한다면, 단지 그뿐이라면 더 중요한 어떤 것을 오히려 빠트리는 게 아닐까? 물론 그 사실을 그대로 그렇다고 말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87년 6월 10일에야 ‘그들은 폭도가 아니었다.’고 거리에서 큰소리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는 그 지점까지 갔다. 하지만 그로부터 또 20년이 지났는데, 단지 거기까지 가는 걸로 충분한가? &lt;br /&gt;
&lt;br /&gt;
이 영화가 결정적으로 빠트린 것은 무엇일까? 아니, 5.18의 광주시민들은 폭도가 아니야, 그들은 무고한 시민이야, 전두환 정권은 살인마였어, 라고 말할 때,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시민 대 계엄군. 국민 대 국가. 피해자와 가해자. 범인은 광주시민이 아니라 전두환 정권. 진실은 밝혀진다. 역사의 심판. 여기에 빠져있는 게 무엇인가? 영화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lt;br /&gt;
&lt;br /&gt;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A와 B가 있다. A가 B를 죽였다. 그리고 A는 B가 죽을 만한 짓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거짓으로 밝혀진다. A는 죄의 대가를 받는다. 이것이 5.18일까? &lt;br /&gt;
물론 그렇지 않다. 5.18의 광주시민들은 단순히 계엄군의 총칼에 죽임을 당한 피해자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가 빠트린 것은 이 지점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이 무고한 시민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영화가 놓치게 된 것은,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다는 역사적 사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선택은 무고한 시민으로서 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 선택을 통해 그들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니게 된다. &lt;br /&gt;
다소 위험한 논의일 테지만 5월 21일 공수부대의 발포 이후, 그들은 무장을 하게 된다. 이미 이 지점에서 그들은 더 이상 무력한 피해자, 무고한 시민이길 그친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 그 권력이 비록 정의가 아니었을지라도 - ‘폭도’가 된다. 누군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해서, 그 자신 스스로가 되갚아 그 살인자를 죽인다면 이 또한 무법적인 행위 - 살인이 된다. 살인자가 된다. 물론 여기서 곤란한 점은, 살인자가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개인이거나 단체가 아니라, 어쩌면 법 자체라 할 수 있는 국가권력이라는 점에 있다. 이것은 어려운 이야기다. 이를테면 국민이란 무엇인가? 국민은 권리이면서 의무이다. 내가 국민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 규칙 속에 들어있음을 말한다. 그 규칙이 옳은가, 그른가라는 문제는 내가 국민이라는 사실과 무관하다. 그 규칙을 벗어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국민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 거꾸로 말할 수도 있겠지. 국가 또한 권리이면서 의무가 아니겠는가? 국민을 살해하는 국가는 더 이상 국가가 아니지 않겠는가? &lt;br /&gt;
&lt;br /&gt;
5월 22일, 무장한 시민군에 의해 계엄군이 시외곽으로 퇴각했을 때, 광주에는 더 이상 국가권력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권력이 그곳에 없는 이상, 그들 또한 더 이상 국민이 아니게 된다. 광주는 반국가권력이거나 무국가권력의 공간이 된다. 이 공간이 어쩌면 공동체없는 공동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원-공동체의 형상을 보여주지는 않는가? 왜냐하면 역사적 기록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국가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그들은 오히려 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결코 무법지대가 아니었다. 이것이 영화가 놓치고 있는 첫 번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공동체는 어쩌면 그들 외부에 여전히 그들을 위협하는 국가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amp;nbsp;&amp;nbsp;중간적인 - 임시적인 공백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lt;br /&gt;
&lt;br /&gt;
하지만 그 다음에 그들은 또 다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지점으로 내몰린다. 수습위원회와 계엄군과의 협상은 결렬된다. 계엄군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원한다. 실제로 계엄군은 그들의 어떠한 요구도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협상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패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패배한 적에게 왜 무언가를 내줘야 하겠는가? 시민군도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그들이 이미 패배해 있었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다시 ‘시민’이 될 수 있었다. 총을 바닥에 내려놓는 것으로, 전남도청에서 나오는 것으로, 5월 18일 이전, 원래 그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그들은 다시 ‘시민’이 되고, 다시 ‘시민’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원래 그들이 있던 곳으로 가는 거 아닌가? 이 부근에서 역사적 사실은 이러한 갈등의 양상을 얘기하고 있다. 매파와 비둘기파. 강경파와 온건파의 갈등. 영화는 이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어쩌면 이 선택을 보여줄 수 없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광주시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고한 시민으로 남아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에서도 떠나는 자와 남는 자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곳을 떠난다는 게 무엇인지, 남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저 가슴 아픈 이별 장면 정도로 그친다. 왜냐하면 사실 아무도 그곳에 남아있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그들이 전남도청에서 지킬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전남도청은 ‘시민’들의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들이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면 자신들의 집이나 가족, 여자가 아니었겠는가? 기록에 의하면 26일 밤 150여명 정도가 도청에 남았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5월 18일 계엄군은 무자비하게 광주시민들을 폭행한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시민들이었다. 5월 21일 총을 맞은 것도 시민들이었다. 하지만 5월 22일, 계엄군과 싸우기 위해 무장한 사람들은 시민이었을까, 폭도였을까? 폭도였다 하더라도 그들을 폭도로 만든 것은 폭압적인 국가권력이었다. 그들이 폭도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권력이 그들을 내리 눌렀기 때문에 그것에 항거해서 일어선 것이다. 그들이 폭도였다면 그들이 국가권력에 무력으로(불법적으로) 대항했기 때문이고, 그들이 폭도가 아니라면 그들이 대항한 국가권력이 부당한 것(불법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나 권력과 반권력, 법과 불법의 사이클 속에 있다. 이제 그들의 마지막 선택, 5월 26일 전남도청에 남기로 한 선택은 어디에 있을까? 권력인가, 반권력인가? 법인가 불법인가? 왜냐하면 그들은 패배 그 자체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패배한 싸움에서 패배를 선택하는 것으로 그들은 살 수 있었다. 도청을 떠나는 것이 그것이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 어쩌면 이것은 자신들이 폭도임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아있는 것이 자신들이 시민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을까? 남아있는 것으로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라고 항변하고자 했던 걸까?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갔던 사람들, 집에 있었던 사람들이 시민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요원은 방송을 통해 그들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광주시민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lt;br /&gt;
&lt;br /&gt;
그날 밤 도청을 떠나 살아남은 사람들 중 한 여성은 인터뷰에서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느꼈던 심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무 무서웠어요. 총이 무서웠던 게 아니라 시체들이 무서웠어요. 뚜껑이 덮여 있지 않는 관들이 있었는데 얼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체들 때문에, 그 옆을 지나온다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lt;br /&gt;
&lt;br /&gt;
얼굴이 없는 시체들. 죽었으나 죽음을 확인할 수 없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몸뚱이들. &lt;br /&gt;
패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패배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 그럼으로써 그들은 패배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승리를 뜻하지 않는다. 살아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패배보다 더 가혹하고, 죽음보다 더 비참하다. 패배했으나 패배하지 못하고, 죽었으나 죽지 못하는 것. 살아있는 시체가 되는 것. 5월 26일 밤, 도청에 남은 150여명의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 그것이다. &lt;br /&gt;
&lt;br /&gt;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것, 그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 당신이 틀렸고 내가 맞았다고 말하는 것, 이러한 것은 언제나 도덕적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언제나 반도덕적이 될 수도 있다.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다시 권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것은 아니다. 누가 옳은가? 무엇이 더 공중에게 이득이 되는가를 따지는 것이 항상 이기적인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리고 또 그렇다. &lt;br /&gt;
&lt;br /&gt;
‘스카우트’의 임창정은 폭도가 아니다. 심지어 임창정은 광주 시민도 아니다. 임창정은 그렇게 말한다. 나는 폭도가 아니에요. 나는 광주시민이 아니에요. 그리고 결국 풀려난다. 그런데 그는 다시 돌아온다. 물론 이 돌아옴 자체는 다분히 이기적인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구출하기 위해서였으니까. 하지만 이 표면적인 이유 외에 다른 이유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그는 다시 폭도가 되는 것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과거 어느 한 순간의 자신을 '반복'하는 것처럼. 그는 경찰청을 습격한다. 그리고 여자를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영화의 놀라운 장면은, 앞선 말했던 공중전화 부스가 있는 그 골목은 이 다음에 나온다. 그는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먼 거리에서 바라보여진다. 그는 그저 계엄군에 의해 개처럼 끌려갈 뿐이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가 목숨을 걸고 구출한 그의 여자는 몇 십 년이 지난 후 다른 남자와 결혼해 자식들을 낳고 잘 살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자신이 광주에 내려왔던 애초의 목적, 선동렬도 잃고, 여자도 잃고, 심지어 그 자신의 승리조차, 동시에 자신의 죽음조차 잃어버린다.&lt;br /&gt;
&lt;br /&gt;
하지만 ‘화려한 휴가’의 김상경은 클로즈업 된다. 그의 얼굴은 화면 가득히 떠오른다. 폭도는 총을 버려라. 하지만 김상경은 총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폭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총을 버릴 이유가 없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나는 ‘무고한 시민’이다. 영화의 아이러니는 이 말과 행동의 불일치에 있다. 무고한 시민이라면서 왜 군인들을 향해 총을 쏘는가? 무고한 시민이라면 총을 버리는 게 맞고, 총을 쏜 이상 그는 더 이상 무고한 시민이 아니다. 김상경은 여전히 그 악순환의 내부에 있다. 그의 논리는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폭도가 되는 것이니, 죽음으로써 시민이 되고자 하는 데에 있다. 그는 자신의 명예로운 죽음을 얻는데 성공한다. 그는 끝까지 무고한 시민으로 남아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이름을 얻는다. 잊지 말아줬으면 싶은, 아니 잊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름을 얻는다. &lt;br /&gt;
임창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앞서 임창정이라면 총을 버렸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반드시 그가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면, 어쩌면 그는 이렇게 외쳤을지 모른다. ‘내가 폭도다.&amp;nbsp;&amp;nbsp;폭도니까 이렇게 죽는 거다. 폭도니까 맨날 이렇게 죽는 거다. 죽었는데 또 죽고, 또 죽는 거다.’&lt;br /&gt;
&lt;br /&gt;
최근 뉴스 중에 인도에서 일어난 하층계급의 시위 뉴스가 있었다. 그들의 시위 요구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계급을 한 단계 더 낮춰 최하층계급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최하층계급이 받는 혜택을 받게 해달라는 것이다. 한 페이지의 짧은 기사에 불과하므로 정확한 진상은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어쨌든 인도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lt;br /&gt;
권력에게 자기 자신에게 그 권력을, 그 권력 중 일부를 나누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 권력에 대항하는 다른 권력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 권력을 향해 그 권력은 원래 내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 앞서 말했듯이 그러한 선택과 요구가 잘못되었거나 가치 없다고 말할 의도는 없다. 최하층 계급이 되고 싶다든지 하는 게 절실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 자신의 주장처럼 이것은 정치적인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이 다른 권력이 되고, 권력 중 일부를 나누어 가지게 되었을 때, 그것이 원래 내 것이었음을 인정받을 때, 적어도 그렇게 경험했을 때. 그들은 돌아갈 테고, 돌아갈 곳이 있다. 집으로, 원래 그들이 있던 곳으로. 불만족스런 시민이었다가 만족하는 시민으로. 그렇게 해서 세상은 좀 더 나아진 걸까? 적어도 그들 자신에게는 좀 더 나아진 건지도 모른다. &lt;br /&gt;
자, 이제 여기서 빠져있는 것은 무엇일까? &lt;br /&gt;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폭도’다. 모두가 무고한 시민이니까 그곳에는 ‘폭도’가 없다. 시민으로 나와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을 획득하고 다시 시민으로 돌아간다. 폭도는 어디에 있는가? 폭도는 없는 것일까? 국가권력이 폭도일까? 경찰이 폭도일까? 아니지. 시민은 국가를 상대할 뿐 폭도를 상대하지 않는다. 폭도는 배제되어 있다. 국가 또한 마찬가지다. 폭도는 국민이 아니므로 상대할 필요가 없다. &lt;br /&gt;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은 그들 누구도 ‘처음부터’ 폭도가 아닌데, 폭도가 있다는 것이다. 얘기는 이렇게 진행된다. 너희 폭도지? 우리는 폭도가 아니야. 폭도 같은데? 너희들 주장은 순수하지 않아. 순수한 시민들은 그런 주장을 하지 않지. 아니, 우리는 순수한 시민이야. 우리의 요구는 불순하지 않아. 우리는 폭도가 아니야. 폭도는 ‘저기’에 있어. (어디? 광주에?, 전남도청에?) 아니, 잘 구분할 수 없는 걸. 너희들이 저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봐. 너희 중에 폭도를 추려내. 너희가 폭도가 아니라 순수한 시민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너희들은 주장할 수 있어. &lt;br /&gt;
또 얘기는 이렇게 진행된다. 일이 이렇게 된 건 폭도가 있기 때문이야. 폭도 때문에 순수한 시민들이 피해를 입고 있어. 폭도들이 너희들의 것, 너희들의 소중한 것을 빼앗고 있는 거야. 우리가 힘을 합쳐 폭도를 쫓아내야해. 너희 시민들에게는 그런 힘이 있어. 권력이 있지.&lt;br /&gt;
물론 실제 얘기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lt;br /&gt;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 사이에, 국가와 국민, 권력과 반권력 사이에 ‘폭도’가 있다는 것이고, 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 있었고 나중에는 없다. 동시에 그것은 처음에는 없고 나중에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니지만, 우리들 중 하나다. 놀랍게도 시민들 모두가 폭도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다시 보면 물론 그들은 순수한 시민이다. 하지만 그들이 순수한 시민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이 폭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러한 노력의 가장 가장자리에서 가장 폭도와 가깝게 보인다. 나는 폭도가 아니야, 라고 외치는 그들의 얼굴이 가까이 비치면 비칠수록 그들은 순수한 - 무고한 시민처럼 보이고,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들의 외침이 들리지 않을수록 폭도처럼 보인다. &lt;br /&gt;
폭도는 마치, 우리는 폭도가 아니야 라고 말하는 순간에 생겨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순수한 시민이야 라고 말하는 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다. 물론 여기서도 빠져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우리가 폭도야. &lt;br /&gt;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lt;br /&gt;
모두가 우리는 폭도가 아니야, 우리는 순수한 시민이야 라고 주장할 때, 이 주장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으면서 이 주장에 의해 배제되어 있는 주장. 우리는 폭도야 라는 주장이 바로 온전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행위가 된다. 하지만 정치적인 행위로써의 우리가 폭도야 라는 이 주장은 아무 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를 1980년 5월 26일 밤으로 데려간다. 얼굴 없는 시체들이 있는 곳, 2만 5천 계엄군에 의해 포위되어 있는 전남도청의 어느 창문 곁으로 데려간다. 그들에게는 한손바닥으로 다 쥘 수 있는 몇 발의 칼빈소총 탄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그곳을 선택했다.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폭도로 남았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이, 그들의 죽을 수 없는 죽음이 바로 5월의 광주였다. 그들은 더 이상 무고한 시민이 아니고, 국민이 아니다. 그들이 바로 국가 자체였고, 그들이 1980년 5월의 대한민국이었다. &lt;br /&gt;
&lt;br /&gt;
5. 18에 대한 다큐멘터리 중 하나에는 18년째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어떤 사람의 인터뷰가 담겨있다. 그는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 남았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은 시민군 중 한 사람이다. &lt;br /&gt;
‘망월동에 다 묻혀있다고.’&lt;br /&gt;
‘아따, 내가 아는데 그래 … 사람은 안 죽고 묘가 아니라 다 공원, 다 … 공원.’&lt;br /&gt;
‘왜 그걸 안 믿을라고 해요?. 형 앞에서 ……오빠 앞에서 총 맞고 다 숨 거뒀잖아요.’&lt;br /&gt;
‘그래도 성경에 나와 …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돌아가셨어요. 그래도 성경에 보니까 죽었다 하지 마라. 잠잔다, 잠잔다 하라 해요. 이렇게 나와요. 주 하나님 말씀이에요.’&lt;br /&gt;</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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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6 Jun 2008 04:37:19 +0900</pubDate>
    </item>
    <item>
      <title>물고기통신 114 - 고양이가 보는 것</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479</link>
      <description>&lt;p&gt;고양이는 가끔 보이지 않는 뭔가를 바라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고양이를 길렀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나도 고양이를 기른다. 어젯밤, 고양이가 뭔가를 바라봤다. 허공에 있는 무언가를. 목을 길게 빼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울기도 한다. 누워있는 내 가슴 위를 건너뛴다. 나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다. 정말, 고양이가 무언가를 보고 있네, 하고 생각한다. 그녀의 말을 떠올린다. 몇 번인가 내 가슴 위를 뛰어넘었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뛰어넘었다가 한다. 나는 대체 고양이가 뭘 바라보고 있는지, 고양이의 고개가 향하는 방향을 유심히 바라본다. 정말 고양이는 아무 것도 아닌 걸 바라보는 걸까? 가령 유령 같은 걸? 하지만 아니었다. 아주 작은 날벌레다. 그것이 천장에 달라붙어서 잠깐씩 날았다가 다시 붙었다가,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아무렇게나 기어 다니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틀렸네.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게 아니네. 그렇군. 다만 그렇게 보일 뿐. 고양이가 보고 있는 게 너무 작기 때문에. 혹은 고양이가 너무나 자주, 무언가, 아주 작은 것을 골똘히 바라보기 때문에. 하지만 고양이는 확실히 바라보고 있다. 자기가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확실히 존재하는 무언가인 것이다. &lt;br /&gt;
&lt;br /&gt;
나는 여자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고양이의 입장에서 그녀에게 원망의 말을 던지고 싶다. 이봐, 함부로 오해하지 말아줘.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너일지도 모르는 거야. 네가 보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닐지도. 고양이가 아닐지도. 모두가 그렇지만, 그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지. 실제로 그것이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것을. &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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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1 May 2008 20:34:02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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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물고기통신 113</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478</link>
      <description>&lt;p&gt;그 배들이 세계의 끝으로부터 온 것은 &lt;br /&gt;
너의 아주 작은 소원까지도 들어주기 위한 것. &lt;br /&gt;
&lt;br /&gt;
-보들레르 '여행에의 초대' 중에서&lt;br /&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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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5 Apr 2008 22:46:2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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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물고기통신 112</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477</link>
      <description>&lt;p&gt;잠이 오지 않는 밤에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다보면 반드시 이르게 되는 생각의 끝이 있다. 그건 지금껏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이다. 아니, 무엇을 잘못했다기보다는 ‘어떻게’ 잘못했는가, 그 일이 어째서 그런 잘못된 결과가 되었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대개 그 답을 찾아내는데, 이러저러한 방향으로 검토한 결과 내가 찾아낸 답은 꽤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나는 내가 한 잘못들을 알게 된 것 같다. 다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일을 잘할 수 있는가 이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백 가지 잘못된 방법을 알게 된다고 해서, 한 가지 잘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다. 어떤 일을 잘못하는 방법은 무한정으로 많을 수 있다. 
&lt;p&gt;&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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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12 Apr 2008 03:04:08 +0900</pubDate>
    </item>
    <item>
      <title>물고기통신 111 - 소설이 될 수 있다</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476</link>
      <description>&lt;p&gt;도서관을 나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보도 옆 축대 위에는 벌써 개나리가 피어있었고 물에 젖은 흙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코로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그리운 냄새가 났다. 버스가 오는 방향에서 여고생 하나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래 위 똑같은 진청색의 교복은 도저히 꾸미려야 꾸밀 수 없는 패션이었지만 몸의 균형이나 자세가 좋은 탓인지 제법 눈길이 갔다. 얼굴형은 다분히 남성적으로 각이 져 보였고 미인이라 할 만하지는 않았지만 피부가 유난히 하얗고 눈이 깊어 보였다. 단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시선을 아래쪽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녀 뒤쪽으로 똑같은 교복을 입은 여고생 네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일렬로 서서 보도의 전체를 차지했다. 먼저 그녀가 나를 지나쳤고 얼마 있다 네 명의 여고생이 나를 피해 대오를 흩트렸다가 지나쳐서 다시 본래대로 대오를 맞추며 걸어갔다. 버스가 왔고 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보도 쪽 창가에 앉아 아까의 혼자 걸어가는 여고생을 눈으로 찾았다. 이번에는 버스를 탄 내가 그녀를 따라 잡아서 지나쳐갔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다시금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별다른 표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지도 않았고, 기쁘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학교를 나와 집으로(또는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을 뿐인 것처럼 보였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나는 시험삼아 혼자 걸어가는 여고생이 얼마나 더 있는지 찾아보았다. 처음 보았던 그녀를 제외하고 한 명을 더 찾아냈다. 하지만 그 한 명은 어쩐지 친구와 함께 걸어오다가 길이 갈라져 혼자 나머지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학교에서 꽤 멀리 떨어진 거리였다. &lt;br /&gt;
&lt;br /&gt;
버스는 그 길의 끝까지 가서 교차로에 이르렀고 건너편 보도 쪽에 커다란 선거 현수막과 그 앞에 주황색 단체티를 맞춰 입은 예닐곱 명의 선거운동원들이 보였다. 그들은 젊은이들이었는데 노래에 맞춰 응원단 같은 율동을 하고 있었다. 버스는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했고 나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그들의 얼굴이나 표정을 살필 수 있었다. 즐거워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하고 있다는 느낌도 없었다. 다만 조금 지쳐보였다. 얼굴은 붉어졌고 이마에는 땀이 번들거렸다. 예상보다 더 어려보이는 친구도 있었는데 실제로 그런 건지 그렇게 보일 뿐인지 알 수 없었다. &lt;br /&gt;
&lt;br /&gt;
집으로 돌아와서 혼자 걸어가는 여고생과 주황색 단체티를 입은 젊은 선거운동원 사이에 무슨 연관 지을 만한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굳이 연관 지으려고 한다면 그건 언제나 가능한 일일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소설이 될 수도 있다.&lt;br /&gt;
&lt;br /&gt;
봄이다. &lt;br /&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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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7 Apr 2008 14:50:54 +0900</pubDate>
    </item>
    <item>
      <title>물고기통신 110 - 팬케이크</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475</link>
      <description>&lt;p&gt;어제 밤에 침대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팬케이크가 먹고 싶어졌다. 어느 미국 드라마에서 본 때문이었다. 일어나서 팬케이크 조리법을 인터넷으로 알아보려다 귀찮아져서 그냥 잤다. 오늘 낮 동안 까맣게 잊고 있다가 방금 전에 인터넷으로 조리법을 찾아보았다. 밀가루, 설탕, 계란, 우유 또는 물. 이게 전부다. 팬케이크. 이게 전부라고? &lt;br /&gt;
물도 떨어지고 해서 슬슬 장보러 가야할 때가 되가는데 이번에는 장보기 목록을 작성해 볼 생각이다. 그날은 내가 팬케이크를 해먹는 날이 될 것이다. 어쩐지 장을 보고 와서 밀가루에 계란을 풀고 우유도 넣고 해서 팬케이크를 해먹는다고 생각하니 내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lt;br /&gt;
메이풀시럽을 곁들인다면 더 맛있겠지. 팬케이크. 그게 전부다. &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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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0 Mar 2008 20:05:24 +0900</pubDate>
    </item>
    <item>
      <title>자매들</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225</link>
      <description>&lt;p&gt;우연이라면 우연이고, 아니라고 한다면, 가령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또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최근에 내가 만났던 여자들은 계속 여자 형제 밖에 없는 여자들이었다. 그 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본 건 아니고, 어느 날 전철을 타고 이동하다가 열차가 지하를 빠져나와 지상 구간에 접어들었을 때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고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 그러네, 자매들이었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몇 명중에 몇 명이 그랬는지를 밝힐 수는 없다. 어쩌면, 그건 거의 의미 없는 비율인지 모른다. 일종의 규정타석 미달이랄까? 표본자체가 부족하다. 하지만 이 점은 확실한데, 나는 그녀들이, 또 그녀가 여자 형제 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여동생, 언니 밖에 없다는 사실에 끌렸던 것 같다. 적어도 오빠나 남동생이 있는 것보다는 훨씬 좋았다. 그러니까 나는 때때로 그녀들의 얘기를 듣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언제까지 같은 침대를 썼다든지, 어떤 소꿉놀이를 했다든지, 언니가 자신을 보호해줬다든지, 여동생에게 무슨 선물을 했다든지. 분명 사이가 나쁜 경우도 있었을 테지만, 나는 그냥 사이좋은 자매들의 이야기기 좋다. &lt;br /&gt;
이건 어쩌면 내가 남자고, 남자 형제 밖에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린 시절 보았던 소설이나 영화의 이야기들, 작은 아씨들이라든지, 또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형제들의 이야기 때문일 수 있다. 어쨌든 나한테 갑자기 여동생이 있거나, 누나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 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일이 분명 나한테 자매가 있는 일일 테니까. 그건 내가 먼저 여자가 되어야 하는 일 아닌가?&lt;br /&gt;
하지만 따지고 보자면 내가 남자고 남자 형제들 밖에 없다 하더라도, 나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남자 형제들밖에 없는 다른 남자의 삶에 대해서 다른 누구들보다 더 잘 알고 있거나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타인의 삶에 우리는 얼마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더 잘 알 수 있을까?&lt;br /&gt;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아마도 반대일 거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넌 나를 이해 못해. 그래, 이해 못한다. 하지만 너 자신도 이해 못하지. 이야기는 끝이 없는 거다. 실제로도 그렇다. 가령 우리는 시간이 약이라고 하는데, 시간은 어쨌든 내 바깥에 있는 것이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다. 그런데 ‘그것’이 나를 치료해 준다니. 내 마음이 너무나 아프고 힘들어서 견디기 어려운데, 내가 바랄 것이 ‘시간’ 뿐이라면. 나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다. 하물며 타인에 대해 내가 무슨 권한을 가지고 있겠는가? 권한 이전에 어떤 이해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다시 말하는데, 사실은 그 반대다. 아마도.&lt;br /&gt;
만일 그저 누군가라면, 내가 아닌 누군가라고 한다면,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지금 이 순간, 혹은 바로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이 나를 속이려고 한다면 그건 언제나 너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들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어떤 사람들, 유명인들, 부자들, 가난뱅이들, 살인자들, 게이, 레즈비언, 아마도 나는 그들을 잘 알고 있다. 내가 그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대개는 변명에 불과하다. 때로 어떤 행동들은 이해할 수 없기는 하지만,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공감할 수는 있다. 행복하다든지 불행하다든지, 도망치고 싶다든지 고통받는다든지, 무섭다든지, 도움을 바란다든지. 내가 그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니고, 앞으로 살게 되지도 않을 테지만, 아마도 나는 그들을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내 자신의 이해력이 누구보다도 크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건 아니다. &lt;br /&gt;
정확히 말해서 이것이 세계인 거다. 정확히 말해서, 내가 그렇게 알고 있는 한의 세계인 거고, 내가 그렇게 알고 있는 한의 사람들인 거다. 모른다고 말한다면, 내가 그렇게 모르는 한의 세계인 거다. 이 말은 거꾸로 나는 내가 모르는 세계를 알고 있는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내 자신을 끊임없이 어딘가에 내맡기거나, 어떤 일에 연루시키거나, 누군가의 삶에 전적으로 포함시키려 해도, 가장 작은 부분으로 남고 싶어도, 결코 완전히 이 세계로부터 사라질 수 없는 것처럼.&lt;br /&gt;
열차가 지상으로 올라오고 하얀 햇빛이 비추는 도시의 외곽지역을 창밖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자매들의 생각을 한다. 여자 아이 하나와 또 다른 여자 아이 하나가, 한 집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이야기를 생각한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그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려본다. 이전에도 물론 만나본 적이 없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결코 만날 일이 없는 여자친구의 자매들. 그리고 그녀 자신. 물론 나는 그녀들을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그녀를 사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나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하지만 내가 그 자매들을 생각하는 건, 때로 그들이 좀 달랐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결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삶들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면 그들은, 그 자매들은, 사이좋고, 한 침대를 쓰기도 하고, 소꿉장난도 하는, 그들은 행복할 수 있을 텐데. 자매들의 세계에서. 내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내가 먼저 여자가 되지 않는 한. &lt;br /&gt;</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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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1 Mar 2008 21:56:16 +0900</pubDate>
    </item>
    <item>
      <title>물고기통신 109 - 연기하는 꿈</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474</link>
      <description>&lt;p&gt;며칠 전에 내가 연기자가 된 꿈을 꾸었다. 아니 연기자가 되었다기 보다, ‘연기’를 하는 꿈을 꾸었다는 게 맞을 거다. 아무리 꿈속이라 해도,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나조차도 부끄러운 ‘연기 비슷한’ 어떤 짓을 하고 있었다. 왜 내가 연기자가 된 거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사람들이 내게 뭐라고 욕을 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굉장히 지독하고 불쾌한 꿈이었는데, 현실로 치자면 내가 외국의 호텔 프론트에서 더듬더듬 영어를 하는 상황과 비슷하겠다. (실제로 그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안다. 항상 그렇듯이 상대방은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내게 어떤 것을 요구했는데, 나는 도대체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 가장 나빴던 건 내가 그 자리를 도망쳤다는 거다. 호텔은 어디에나 있는 걸, 하면서) &lt;br /&gt;
어쨌든 연기자란 대단한 거다. 나중에 더 나이가 들면, 일종의 사이코 드라마 같은 건 할 수 있지 않을까? 병원에서 하는 치료용의 연기. 역할극. 아마 내가 맡은 역할은 외국인에 대해 끔찍한 공포를 가진 사람쯤 되지 않을까? 이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자신감을 가져,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lt;br /&gt;
최근에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이다.&lt;br /&gt;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라는 데, 이 연극에 나는 너무 서툴다. 객석으로 빨리 퇴장하고 싶은 걸. 그래도 보는 건 좋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운이 좋다면 야한 장면을 볼 수도 있으니까. 뒤집혀진 치마라든지. &lt;br /&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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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0 Mar 2008 18:52:45 +0900</pubDate>
    </item>
    <item>
      <title>괜찮은 일</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224</link>
      <description>&lt;p class=&quot;바탕글&quot;&gt;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적, 스물여섯 일곱 살 때 사귀었던 여자는 무용을 전공했었다. 대체적으로 그녀와의 연애는 즐거웠던 걸로 기억된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라든지, 나라든지, 또는 우리라든지 하는 이유가 아니라, 그녀도 나도 아직 젊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즐거운 연애를 하기에 적합한 나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어리지도, 너무 늙지도 않은. 그녀는 나보다 세 살(어쩌면 네 살일지도) 정도 어렸는데, 그렇게 스물일곱, 스물넷의 나이란 1,2년 연애경험을 가지고 결혼을 하기에 적당한 나이였다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어린아이처럼 환상을 품지도 않고, 반대로 서로에 대해 늙은이처럼 너무 따지거나 재지도 않고,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게 남아있음에도 그렇게 때문에 ‘잘 하면’ 행복해질 것 같은. 아무도 나이를 잊고 살 수는 없다. 뻔한 얘기지만, 그렇다, 나이는 결코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스물여섯이나, 스물일곱은 숫자에 불과하지만 서른여섯이나 마흔일곱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나이 들어간다는 거고, 점점 죽음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물론 죽음이 더 빨리 찾아올 수도 있고, 더 느리게 찾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어떤 특별한 의학적인 근거나 경험에 의해 확정되지 않는 한, 그러니까 일종의 시한부 선고가 내려지지 않는 한 현재의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혼자 나이먹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와 나이가 같은 친구나 동료와 함께 나이 먹는다는 게 아니라, 나는 세상의 나이를 먹는 것이다. 서른여섯은 나의 나이가 아니라, 내가 서른여섯 나이에 속하는 것이다.&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사람들은 늙어서도 젊게 사는 법에 대해 얘기한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는 반대로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끊임없이 부정해야만 행복해질 거라는 의미가 되지 않는가? 하지만 또한 누구도 늙음을 긍정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죽음까지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을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건 철학적이거나 의미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아주 단순히 어떤 시간들에 대한 문제이다. 즉, 이미 지나간 시간이나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그리고 이 시간의 연장으로써 계속되는 시간에 관한 문제이다. 이를테면 고통의 시간. 결코 익숙해질 수 없고, 치워버릴 수도 없는 부러진 뼈와 같은 시간이다. 죽음으로써만 벗어날 수 있는 탈구의 시간. 누가 그것을 의미라는 상자에 담아 치워버릴 수 있겠는가? 누가 그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그녀와 나는 약 1년의 연애 끝에 결국 헤어지게 된다. 나는 나중에 그녀를 다시 만날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미안한 일이 있다고 했다. 아직 우리가 사귀던 시절, 무용학과였던 그녀는 졸업발표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남자친구라면 당연히 참석해야 할 발표회를 나는 가지 않았다. 다른 모든 동기 여자들이 남자친구로부터 꽃다발을 받을 때, 그녀는 한쪽 구석에 혼자 서 있어야 했다. 내가 그날 그녀의 발표회에 가지 못했던 데에는 변명이 있지만, 그것은 누구한테 말하기도 부끄러운 변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괜찮다고 했다. 나는 그 얘기를 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이 그날 괜찮다고 말했던 건, 앞으로 계속 내가 그녀 곁에 있을 것이므로 괜찮다는 뜻이었다고 했다.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죠. 그날의 일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할 거라고.&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정말 괜찮은 걸까?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오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건 괜찮은 일이 아니다. 내일 당장 헤어질지 모르므로 오늘 모든 행복한 일들을 행해야 한다. 하지만 내일 당장 헤어질 텐데, 오늘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할 수 있을까?&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이 두 가지 생각의 틈새는 이런 게 아닐까? 내일 당장 헤어질 것 같아도 헤어지지 않을 것처럼 사랑하고, 영원히 살지 못하더라도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것.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사람은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도 그렇게 -처럼 살 수는 없다. 그것은 그저 수사일 뿐이다. 그것은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고 일단 믿는다면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어야 한다. 진실이 아니라도 믿는다는 식의 눈가림은 통하지 않는다.&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그리고 우리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고, 믿음은 약해져 간다. 믿음의 근거가 약해지는 게 아니라, 믿을 만한 일들이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음 그 자체가 약해진다. 그저 지금 눈앞의 일들,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것들, 때로 과거의 추억이나, 미래에 대한 믿음 없는 낙관 같은 것들만 붙잡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더 많은 것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생각지도 않으면서. 때로 어떤 믿음들은 새로 생겨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괜찮은 걸까? 네가 내 옆에 앞으로도 계속 있을 테니까. 나는 어쩌면 그녀가 괜찮다고 말한 이유가 사실은 그 반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괜찮아요. 그러니까 계속 내 옆에 있어줘요. 당신이 계속 내 옆에 있다면 이건 아주 작은 일이 될 거에요. 하지만 마침내 그 일이 일어나고, 그렇게 해서 실제로는 어떤 일도 아주 큰 일이 되는 걸까?&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br&gt;&lt;/p&gt;</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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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radiofish.tistory.com/224#entry224comment</comments>
      <pubDate>Thu, 28 Feb 2008 02:24:14 +0900</pubDate>
    </item>
    <item>
      <title>물고기통신 108 -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title>
      <link>https://radiofish.tistory.com/473</link>
      <description>&lt;p&gt;예전에, 그게 얼마 전의 일인가요, 제가 대학사무실에서 조교를 하던 시절에 공사문제로 얼마간 옆 건물로 사무실이 옮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때는 여름이었는데, 문제는 옮겨간 사무실의 위치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8층(어쩌면 9층이었는지도)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으로는 두 개 학과 사무실이 한 방을 썼었는데&amp;nbsp;&amp;nbsp;같이 방을 썼던 다른 학과 조교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아예 그편에서는 업무자체를 중단한 듯했습니다. (정말일까요?) 방학 기간이었으므로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일주일 내내 나와야 할 필요는 없었고, 저도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출근을 하는 날에는 학교로 올라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당시 유행하던 과즙맛이 약하게 섞인 생수를 샀습니다. 그리고 8층인가 9층의 사무실에 올라가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어떤 날에는 점심을 건너뛰면서 퇴근시간까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초반에 몇 번인가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반복하면서 생각만큼, 아니 생각이상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어찌된 일인지 아침에 처음 그 계단을 올라가면서 이제 올라가면 저녁까지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 또는 않겠다, 라는 점이 저를 기분 좋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찌되었든 한 번 올라가 있으면 아까 말했던 다른 학과 조교는 물론이고, 저희 학과 학생, 조교, 강사 등 거의 누구도 그곳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뭐라 해도 엘리베이터도 없는 8층인가 9층에 있었으니까요. 그 건물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으로 짐작하다시피 오래된 건물이었는데, 계단을 오를 때나 복도를 걸을 때면 오래된 건물 특유의 돌 냄새, 습한 곰팡내 같은 냄새가 났습니다. 그것은 나쁘다기 보다 오히려 친근한 냄새였는데, 마치 오랫동안 햇빛이 들지 않아 짙게 밴 그늘의 냄새 같았습니다. 반팔 셔츠 밖으로 드러난 맨살에 서늘한 느낌이 듭니다. 사무실에는 하늘로 난 창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으로 나 있었는데 입구에서부터 그 창까지의 거리가 사무실의 전체 길이였습니다. 저는 문을 열고 들어가서 편의점에서 사온 생수를 창 앞의 책상 위에 놓고 창문을 열고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켭니다. 음악을 듣기도 하고 책도 읽고 담배도 피우고, 몇 가지 업무도 처리합니다. 몇 통의 전화가 옵니다. 하지만 급한 일은 아닙니다. 저를 그곳에서 끌어내지는 못합니다. “죄송한데요, 지금 사무실에 저 혼자라서 당장은 갈 수가 없고요, 이따 퇴근하기 전에 들르겠습니다. 예, 예, 제가 있는 곳이 엘리베이터도 없는 8층(또는 9층)이라서 그렇게 쉽게 왔다 갔다 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lt;br /&gt;
&lt;br /&gt;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때보다 높은 것은 아니지만 저는 또다시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에 있습니다. 여기서 엘리베이터가 없다거나 5층이란 점은 사실 큰 의미가 없습니다. 1층보다는 계단이 많긴 하지만, 5층이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거기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실제적인 연관성도 없고, 비유적인 연관성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그 시절에 제게 걸려왔던, 아니 저라기보다는 사무실에 걸려왔던 전화들을 떠올립니다. 저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또 포트의 물을 끓여 일회용봉지커피를 일회용 컵에 담아 마십니다. 담배도 피웁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여름의 구름을 보기도 하고, 하여튼 시간들이 천천히 흘러갑니다. 그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어쨌든 저를 그곳에서 나오게 하려는 목적을 가졌던, 아니 애초에 올라가야 했던 목적을 주었던 그 전화들 때문이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일에 무관심한 것만 같은 세상이 나에게 ‘거기 있어라, 그 자리에 있어라.’라고 말해주는 듯한 전화입니다. 물론 그것은 제 전화가 아닙니다. 요컨대 저는 단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지요. 또 저는 그 전화에 대고 ‘이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저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라고요. 퇴근시간이 되면 저는 책과 필기도구 등을 가방에 집어넣고 컴퓨터를 끄고 책상 앞에서 일어섭니다. 문까지 걸어가 마지막으로 뒤돌아보고 무언가 놔두고 온 것이 없는지, 끄지 않은 것이 없는지 확인하고 벽면의 형광등 스위치를 내립니다. 날은 아직 어둡지 않아서 아주 조금 사무실 안이 어두워질 뿐입니다. 문을 닫고 열쇠를 문고리에 꽂고 문을 잠급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립니다. 저는 시계를 보고 이미 퇴근시간이 지났음을 확인합니다. 무슨 전화일까? 급한 일일까? 그렇진 않겠지.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문 곁을 떠나 복도를 걸어갑니다. 천천히 사무실로부터 멀어집니다. 여전히 전화벨 소리는 텅 빈 복도에까지 흘러나와 울리고 있습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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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화를 받아야 했을까요? 저는 좀 더 충실해져야 했던 것일까요? 저는, 그 죄를 고백해야만 할까요, 이제? 하지만 이해주어야 할 것은, 그곳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8층인가 9층에 위치해 있단 것입니다. 그 점을 꼭 포함시켜주어야 합니다. 나머지는 다 제 잘못이겠죠. &lt;br /&gt;
&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물고기통신</category>
      <author>물고기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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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5 Feb 2008 14:47:1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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